네 명의 아이돌 그룹 ‘소녀들의 시간’ 멤버를 선발하는 오디션 프로그램 ‘후즈 더 넥스트 위너’의 탑5를 선정하는 날, 시청자들의 관심은 로미 양에게 쏠렸다. 탑5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로미, 금아롬 양은 다른 후보인 은하 양이 자신의 안무를 따라했다고 얼굴을 할퀴었기 때문이다. 작은 소동은 로미 양의 오해라는 게 밝혀졌고 기획사 멘토들에 의해 수습이 되었지만, 은하 양의 광대에 사선으로 난 생체기는 거짓과 건성으로 점철된 사과로 치유될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80분에 걸친 여섯 명의 무대가 끝났다. 전광판에 점수가 공개되었다. 로미와 은하 두 명을 제외한 네 명의 소녀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었다. 로미는 최고점을 받았지만 어둠 속에 갇혔다.
로미 의상에 달린 시퀸이 네온 조명을 반사해 언뜻 늦은 새벽의 인공위성내지 유성 같아 보였다. 팬들이 그토록 밀던, 소녀들의 24시간 중 새벽의 6시간을 맡아야 했던 로미. 얼떨결에 ‘소녀들의 시간’ 멤버로 확정된 네 명의 후보들은 슬픔과 기쁨 중 어느 것을 택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듯 주위를 살피며 옷자락을 꼬았다. 사회자가 말했다. 로미 양의 재능이 출중한 건 한국너머 세계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아이돌 가수를 꿈꾸는 아이들이 결코 봐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고, 그러므로 ‘후즈 더 넥스트 위너’는 로미, 금아롬 양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고 말이다.
카메라는 경련하는 그녀의 손을 클로즈업했다. 어둠 속을 배회하는 위성을 낚아채려는 듯 굳게 쥔 주먹을. 이어 기이할 정도로 평온해보였으며 차갑다 못해 금속성이 느껴지는 미소를. 그녀의 미소가 웃음으로 직결되었을 때 관객들의 함성이 웅성임으로 수축되었다. 수군댐이 침묵의 소실점에 모이자 로미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그녀는 손등으로 코피를 닦으며 말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금아롬 양의 실종신고를 한 사람은 그녀의 사생팬 양 씨였다. 아롬은 프로그램과 A엔터에서 퇴출되었고 어떤 기획사도 그녀를 원하지 않았다. 외려 업계에서는 로미의 상품가치를 의심했다. 귀신 들렸다 했다. 칠Chill하지 못하다, 시대착오적이라 했다. 그런 로미가 기획사 대신 선택한 곳은 종로에서 엄마가 운영하는 꽈배기 집이었다. 가게 맞은 편 토익 학원 자습실에 기거하며 매일 아롬의 생활을 주시하던 양 양은 닷새째 로미를 보지 못했다. 열흘 째 로미가 보이지 않자 양 양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다.
경찰은 유정을 심문하고 아롬의 출입국기록을 뒤지던 중 이 악명 높은 전직 연습생 금아롬(24)이 피트 노블 쉬어라는 미시간 출신의 영어 학원 강사(21)와 혼인신고를 한 다음 날 라오스로 입국했다는 걸 찾아냈다. 라오스에서 마지막으로 확인된 연인의 생존반응은 일주일 전 루앙프라방 ATM에서 총 3회에 걸쳐 현금이 인출되었다는 것. 카드 명의자는 쉬어였고 ATM 기계에는 감시 카메라가 없었다.
일터이자 생활공간이었던 종로 꽈배기 가게 앞에서 이루어진 전유정의 인터뷰는 질의라기보다는 추궁에 가까웠다. 플래시가 유선의 얼굴과 머리를 묶은 핀과 귀걸이와 반지와 목걸이에 값싼 기름처럼 튀었다. 기자가 물었다. 심정이 어떠십니까. 실종신고를 하지 않은 이유가 뭡니까. 대답으로 유선은 실종자 부모가 해야 할 최악의 선택을 했고 때문에 오늘까지 정신과 입원 신세를 져야했다. 입이 바짝 말라도 갈증을 못 느낄 정도로 신경발작이 일었다. 위장에 쌓인 푸석이는 대변 때문에 치열이 생겼다. 그녀는 맑은 다홍색으로 물든 변기를 바라보며 감정이 마비된 탓에 항문이 대신 눈물을 흘리는 거라고 느꼈다.
그녀는 웃었다. 카메라를 향해 부자연스럽고 모호하게. 마흔 네 살의 여자의 떨리는 입술위로 이중인화 효과처럼 로미의 비탄한 웃음이 드리웠다. 본인은 경황이 없어 그랬다지만, 뭘 잘못했다고, 라는 전설적이고도 퉁명스러운 한마디에 의존해 기사를 써 돈을 바짝 벌었던 언론사들은 유정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총선 선거운동 전 까지는 가장 뜨거운 뉴스였으니.
그녀는 병원침대에 누워 자낙스가 든 약병을 흔들며 물었다. 내가 정말 딸의 실종에도 실없이 웃는 미친년이자 무감각한 부모이거나, 딸을 죽인 사이코패스인가요, 라고. 박은 수염이 돋은 턱을 매만진 뒤 포켓 사이즈 노트를 폈다. 그가 귓바퀴에 끼운 펜을 꺼내 수첩을 긁듯 무언가 써내려갔다.
-네.
박한기는 유선이 인터넷과 카톡, 이웃 상인들, 심지어 전남편에게까지 욕으로 뭇매를 맞을 때 나타난 일종의 자선가, 후원가, 퍼블리시스트였다. 부모님 돈으로 홍보회사를 하나 차렸지만 일이 없었다. 자긴 정말 일을 잘 하는데, 희대의 범죄자도 마약사범 연예인도 일본계 회사의 이미지도 회복시킬 수 있는데 도무지 클라이언트를 잡을 수 없었다.
회사 가치를 높이기 위해선 모험 감수가 필수다. 무료로 유정의 홍보를 자처하는 모험이랄까. 사흘 전 유정을 찾았다. 그는 꽈배기 가게이자 가정집으로 쓰는 곳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골방에서 패드 위에 엎드려있던 유정을 내려다보았다. 햇빛이 발악하는 오후임에도 방 안 색조는 희한하게 희읍스레했다. 그는 비타500박스를 내려놓으며 로미의 팬이라고 말했다. 말을 꺼내는 데 큰 용기가 필요했던 것처럼 조심스럽게, 모든 단어를 골라 쓰려는 듯이 느리게. 전부 거짓말이었지만.
-로미 덕에 제 허한 마음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창문 너머 오토바이 굉음이 들렸다. 방풍비닐이 소리 내며 떨었다. 비닐이 겪는 간지럼이 유정의 뒤쪽으로 전염되었다. 그녀는 어정쩡하게 앉아 머리를 긁었다. 로미가 널 채워주었다고. 로미는 가슴 속 열정과 꿈을 빌미로 틈만 나면 유정에게서 무언가 빼앗아 갔다. 시간, 돈, 최소한의 인간적인 태도, 사생활, 마음대로 웃을 수 있는 권리와 고통 없이 똥을 쌀 자유까지. 그런 아롬이가 남들의 마음을 채워줬다니 우스웠다. 웃으려다 참았다. 또 웃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대신 제발 도와달라고 했다. 라나 버진 울 100% 코트를 걸치고 루이비통 타이핀을 한 남자는 믿을만한 사람이 분명하니까.
그는 막 에든버러 대학에서 언론학 박사를 받고 귀국해 꽤 규모가 큰 홍보대행사를 차린 서른여덟 사내였다. 유정의 명예회복 및 아롬 양 실종의 홍보를 자처한 건, 뉴스에서 본 유정이 로미와 닮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정은 DNA가 닮은 것을 초월해 동일한 영혼과 매너리즘까지 가졌다. 둘은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에 오히려 혈육이 아닌 것 같았다.
유정은 병원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골반을 좌우로 꿈틀댔다. 인터넷 상에서 전유정 씨에 대한 비난이 멈추지 않고 있다는 아나운서의 멘트에 대한 절망보단 항문 내벽에 자극을 주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박한기가 말했다.
-라오스로 가야합니다. 거긴 코리안 데스크가 없어요.
-나 여권 없어요.
유정의 말에 박이 실없이 웃었다.
-비행기 삯을 어디서 구해. 하루 벌어 하루 살아. 당신 입장에선 웃기겠지.
유정이 말을 마치고 자낙스 다섯 알을 물도 없이 씹었다. 박은 이빨로 알약을 깨부수는 유정을 보니 로미가 과감히 내지르고 때로는 부담스러운 애드리브를 하며 노래하던 박력은 엄마에게서 물려받았나 싶었다. 유정이 알약을 삼키고 팔짱을 꼈다. 실종이 아니란다. 그녀는 그간 아롬이 저지른 유사-실종의 역사를 읊었다.
-일을 저지르고 수습을 못 하는 아이였어요. 이상한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으니 지금 사파인데 휴대폰을 잃어버렸대, 글라스고인데 틴더로 만난 남자가 변태래, 재능 기부 하러갔다는 나이로비에선 여권을 잃어버렸대. 결국 뭐야. 비행기 표 사달란 소리잖아. A엔터 연습생인 것도 티비로 알았어요.
가습기가 뱉은 수증기는 자유로운 모양을 만들다 증발했다. 유정이 말했다.
-돌아온다니깐.
박은 턱을 괴고 수증기가 나오는 구멍을 빤히 보았다. 그는 혹 정말 실종이 아니더라도 유정이라는 유사-로미, 아니 원형-로미 곁에 있고 싶었다. 유정 스스로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근원도 컨텍스트도 없는 동력, 성능 좋은 항공모터를 심장에 품은 흥미로운 클라이언트였다. 그는 침대에서 반지를 만지작대며 중얼대는 유정을 뒤로하고 퇴원요청서류를 집어 들었다. 유정이 물었다.
-현금 서비스라도 받아야 할까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