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약사 Dec 21. 2021

오늘도 무사히 미션 수행 완료!

약국에서 일하다 보면 생각보다 자주 난감한 상황들을 마주하게 된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마 '처방전을 받아 입력하고, 처방전에 적힌 대로 약을 조제해서, 복약 설명을 하고 내주면 되는 간단한 일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항상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가령 아침 점심 저녁 약이 다 다르고 약 개수가 10가지도 넘는 180일분 처방이라던지...(심지어 자동포장기계가 없는 곳이라면... 실제로 경험해보았기에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여러 가지 약을 복용하는 노인분인데 알약을 못 드셔서 한 달분을 다 가루약으로 조제해야 된다던지..(이런 경우 가루약 양이 정말 엄청나고 갈았을 때 약 냄새도... 조제실이 환기가 잘 안 되는 곳이라면 눈도 맵다.)


이런 조제 상의 어려운 점을 제외하더라도 복약 설명의 난이도도 다양하다. 


'난이도 하'는 일상적인 복약 설명이다. 큰 어려움 없이 소통할 수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대하는 일.(가끔 잔잔한 나의 마음에 폭탄을 던지고 가는 무례한 사람들을 만날 때는 이 역시 '난이도 하'가 아닐 때도 있기는 하지만..) 사실 약국에서 직접 근무하기 전에는 이런 '난이도 하'의 복약 설명만 늘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일해본 결과 현실을 조금 달랐다.


'난이도 중'은 귀가 잘 안 들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대하는 일이다. 보청기를 사용하는 분들도 있지만 불편하다고 안 하고 오시는 분들도 많다. 그리고 보청기를 해도 완전히 적응할 때까지는 잘 안 들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새내기 약사 시절에는 그런 사실을 몰랐기에 그냥 보통 사람들에게 하듯 복약 설명을 했고, 노인분들이 제대로 못 알아들어 두 번 세 번 묻고 같은 말을 반복해야 될 때는 솔직히 짜증도 났다.


하지만 외할아버지가 보청기를 하고도 잘 들리지 않아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며 약국에 오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대할 때도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스스로는 얼마나 답답하실까 생각하며 같은 말을 반복해야 되는 상황에 짜증을 내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전달해드릴 수 있을까 고민을 했다.


"어르신, 약은 아침 저녁 하루 두 번만 드시고요. 이건 가글 하는 건데 하루 3번 정도 하시면 돼요."

"응? 약은 하루 3번 먹어? 물약도 하루 3번 먹고?"

(역시나 한 번에 성공하기는 힘들다... )


"아니요 약은 하루 두 번! (손가락 2개를 펴 보이고 약 봉투에 아침저녁이라고 크게 써드린다.) 그리고 이건 먹는 거 아니고 가글 하시는 거(입에 넣고 가글 하다 뱉어내는 시늉을 한다.)

"아~~ 약은 두 번, 이건 입 헹구는 거?"

(미션 성공이다!!)


가끔 귀가 잘 안 들리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대화를 하다 보면 예전에 즐겨보던 TV 프로그램인 '가족오락관'이 생각난다. 시끄러운 음악이 나오는 헤드폰을 끼고 옆 사람이 말한 단어를 전달하는 게임이 있었다. 가끔 기적적으로 정답을 맞히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전혀 다른 이상한 단어로 바뀌어 웃음을 자아내는 코너였다.


그래서 나도 일종의 게임을 하는 기분으로 나만의 노하우를 만들었다. 노인분들은 어차피 잘 들리지 않기 때문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예전에는 무조건 크게 말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었는데, 노인 약료를 공부하다 보니 크고 높은 목소리보다는 저음으로 천천히 말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로는 목소리를 크게 높이기보다는 낮은 톤으로 천천히, 대신 입모양을 크게 해서 말하고 바디랭귀지를 적극 활용한다. 봉투에 크게 글씨를 적어주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런데 연세가 많은 할머니들 중에는 의외로 글씨를 모르시는 분들도 많다. 그래서 아침 점심 저녁 약이 다를 때는 약포지에 숫자로 1,2,3이라고 적어드리거나, 아침에는 해를 그리고 저녁에는 별을 려서 드리기도 한다.


요즘은 마스크를 써야 되기 때문에 입모양을 보여드릴 수 없어 말을 전달하기 더 힘들다는 애로사항이 있다. 게다가 이렇게 해 드려도 가끔 내 말은 듣지 않고 본인 말만 하고 궁금한 것만 다시 묻는 분들이 있어서 힘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도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노화 과정이라 생각하며 아주 먼 미래의 나에게 말하듯 친절하게 대하자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하루에 너무 많이 이런 분들이 오시면 나도 좀 지치기는 한다.. 조금씩 나눠서 오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ㅎㅎ)

 
그리고 가장 높은 난이도인 '난이도 상'은 시각 장애인 분들이다. 청각 장애인 분들을 대하는 일은 그나마 쉬운 편이다. 청각 장애인 분들은 대부분 약이 나오는 쪽을 주시하고 있다가 약이 나오면 부르지 않아도 알아서 오신다. 그러면 봉투에 용법을 적어드리면 되기 때문에 별로 어려운 점은 없다.


하지만 시각 장애인 분들은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보호자가 같이 오면 가장 좋은데 그럴 형편이 안 되는 경우 혼자 오시는 분들도 있다. 그럴 때는 약을 봉투에 넣어서 앉아계시는 자리에 직접 갖다 드리며 설명을 해드리기도 한다.


그것까지는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가끔 한 달분씩 약을 타 오시는데 아침 저녁 약이 다른 경우가 있다. 그런 상황을 처음 마주했을 때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약포지에 점자 시스템은 없기에 어떻게 구분을 해줘야 되나 잠시 고민을 했다. '점자가 없으면 내가 점자를 만들어줘야지 뭐!' 하는 생각으로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일단 아침 저녁 약을 봉투에 따로 넣고 아침 봉투에는 귀퉁이에 스테플러를 하나 찍어서 구분을 해드렸다. 그리고 아침 약포지에는 약국에 돌아다니던 원형 스티커를 일일이 붙였다. 이만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혼자 뿌듯해하며 앉아계시는 자리로 가서 옆에 앉아 설명을 해드렸다.


아침 봉투의 스테플러 부분을 손에 만지게 해 드리며 "여기 스테플러 만져지시죠? 이게 있는 봉투가 아침 약봉투예요. 아침 저녁 약이 달라서 제가 약봉투에 표시를 해놨어요."

그리고 아침 약을 꺼내 원형 스티커 부분을 만지게 해 드리며 "혹시 약이 봉투 밖으로 나오거나 섞일까 봐 아침 약포지에는 동그란 스티커를 붙여놨거든요. 이게 붙어있는 약이 아침 약이에요. 아셨죠?"


그분은 스테플러와 스티커를 만지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말 고맙다고 인사를 하셨다. 잠깐의 수고가 큰 보람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오늘도 무사히 미션 수행 완료!"  

 
 
 

이전 03화 일의 기쁨과 슬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