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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철도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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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본재 Mar 25. 2019

17살, 사라진 시간

철도 - 1


철도 1 : 17살, 사라진 시간


지방에 사는 모든 학생들에게 서울은 꿈의 도시이고, 나도 예외는 아니다. 인구 20만, 서울에 있는 한 구(區)보다 작은 숫자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목포. 난 내가 태어난 이곳이 정말 지긋지긋하다. 17살이 되던 해 나는 어떻게 해서든 목포를 떠나 서울로 가겠다고 결심했다. 목포를 떠나야 할 이유? 그건 셀 수도 없이 많다. 우선 내가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 선생님들의 면상을 볼 때마다 난 두려움에 벌벌 떨어야 했다. 


‘너희들을 가르치는데 관심은 X도 없단다. 내 유일한 관심은 어서 정년퇴임을 해서 연금을 타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제발 날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주렴. 공부는 EBS와 메가스터디 강의를 통해서 하고 나한테는 그 어떠한 질문도 하지 말아 줄래, 이 개자식들아.’


선생님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난 정확히 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인생을 포기한 그 얼굴들, 그저 오늘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만 가득 찬 그 얼굴들. 말하자면 그들의 얼굴은 망할 내 부모님의 얼굴과 정확히 일치했다. 목포를 떠나지 못하면 나 역시 저런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건 내게 엄청난 공포로 다가왔다.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지만 다행히 내가 입학하기 2년 전에 도서관이 생겼다. 말이 도서관이지 그 크기는 우리 할머니 집에 있는 닭장 3개를 합쳐놓은 것과 똑같은 수준이었다. 참고로 할머니 닭장에는 닭이 최대 6마리까지 들어갈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작은 도서관에 곧장 매료되었다. 그곳에 꽂혀있는 알 수 없는 수많은 책들, 내게 있어 그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나는 항상 내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목포는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고, 소름 돋을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난 항상 눈을 감고 지진 때문에 학교가 무너진다거나, 갑자기 전쟁이 일어난다거나 아니면 미하엘 엔델의 소설 <끝없는 이야기>처럼 내가 책 속의 세상으로 들어가 버리는 상상을 했다. 그렇게 상상을 할 때면 조금이나마 내 삶이 허무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운명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엿이나 먹으라고 그래.” 


17살의 꿈 많은 소년은 내 옆에 앉아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은 분명히 나에게 하는 사랑 고백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걸 알 리 없었다. 나는 17살, 그러니까 내 모든 관심은 오직 나 자신에게만 있을 나이였다. 다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꿈을 안고 살아가는지, 아니면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조차 관심이 없는 그런 나이였다. 어떤 것들은 아주 많은 시간이 흘러야만 분명하게 보이는 법이다.


“가끔 보면 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긍정적이야. 사람들이 운명을 믿지 않는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운명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떠나버리거나 배신하는 경험을 하기도 하거든. 영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 봤어? 마츠코 같은 사람이 어떻게 운명을 믿을 수 있겠어? 이 세상은 경이로울 정도로 잔인한 곳이야. 실없는 낙천주의보다는 진지한 염세주의가 더 나아. 운명을 믿는 것보다는 운명을 믿지 않는 게 더 현명한 삶의 자세라고.”



나는 학교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운 곳이라 할 수 있는 나무 아래 정자에 앉아 그에게 말했다. 바람이 우리 사이로 너무나도 아름답게 지나갔다. 꼭 나를 애무해주는 것만 같았고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옆에 있는 이 남자와 키스하는 상상을 했다. 그는 점점 더 깊숙이 내 입 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우리의 혀는 서로 강력하게 뒤엉켰고 나는 그의 입술을 이리저리 빨아댔다. 미치도록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그가 나를 점점 더 세게 안기 시작했다. 내 가슴이 그의 가슴에 밀착되었고, 조금은 단단한 그의 몸이 느껴졌다. 그의 손이 살며시 내려오더니 내 가슴 위에서 멈췄다. 그가 조그마한 내 가슴을  붙잡으려고 할 때 난 숨을 들이쉬면서 상상하는 것을 멈췄다.  


“내가 실없는 낙천주의자 같아?” 


꿈 많은 17살 소년, 제민이 내게 물었다. 좋아하는 여자가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안은 표정으로. 내가 어떤 상상을 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는 순진 무구한 표정으로. 남자들은 가끔 보면 정말 멍청하다.  


“가끔 보면 그래. 꼭 소녀시대 티파니 같아.” 

“아니야, 아니야. 난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 내가 운명을 믿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 우선…”


그가 말을 이어나가려고 하자 점심시간이 끝났다며 학교 종이 무섭게 울려댔다. 난 언제나 그 종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망할 놈의 종소리는 내게 명령을 내리기 일쑤였다. 밥 먹을 시간이다, 공부해야 할 시간이다, 잠을 자야 할 시간이다, 결혼해야 할 시간이다, 아이를 낳아야 할 시간이다, 죽어야 할 시간이다,라고 내게 말하면서. 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너는 곧장 사회에서 낙오될 것이며, 모든 사람이 너를 한심한 루저라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내게 말하면서. 


난 종소리에 대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드럽게 나를 애무해주는 바람을 뒤로하고 제민과 나는 엿같은 교실에 들어가 선생님 몰래 PMP로 영화를 볼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니까. 


“들어가자. 종 쳤어. 더 말하지 말라는 운명인가 봐.” 


나는 괜스레 제민을 놀려주고는 먼저 교실로 들어갔다. 


“선생님 이번 시즌 기아 타이거즈는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야구 광팬인 국사 선생님이 들어오자, 우리 반의 한 남자아이가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게임 끝이었다. 선생님은 곧장 흥분하여 이번 시즌에 기아 타이거즈는 충분히 훌륭한 성적을 낼 수 있다며, 이유를 말해주겠다고 칠판에 내가 알지도 못하는 야구 이야기를 적어 대기 시작했다. 수업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질문을 한 남자아이는 국사 선생님이 나가면 짧은 시간 동안 우리 반의 영웅이 될 것이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갔고 그건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오늘은 어제와 같고, 또 내일과도 같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삶이라고 부른다.  







에디터 김세라

안녕하세요, 김세라 입니다. 스튜디오 크로아상에서 소설과 예술 작품 리뷰를 하고 있습니다. 꾸준히 글을 써서, 언젠가 아마존에 상품 검색을 하듯이 스튜디오 크로아상에서 예술 작품들을 검색을 하는 날이 오도록 만들겠습니다. 제게 있어서 연애는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한때 낭만적인 연애를 했던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절대로 그 때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아, 소설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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