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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본재 Oct 07. 2019

아버님, 제발 라디오에
사연 좀 그만 보내세요.

가정사를 왜 남들에게 알리지 못해 안달이세요?


*본 편은 실화가 아닌 픽션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사랑이 전부인 줄 알았어요. 어르신들이 결혼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의 문제라고 말하잖아요? 저는 솔직히 헛소리라고 생각했어요.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는 게 제일 중요하지, 상대방 가족이 뭐가 중요한가’라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참 순진했죠. 대학 졸업하자마자 시험공부 1년 끝에 공무원이 되었으니, 저는 정말 세상에 대해서 하나도 몰랐던 것 같아요.


명절은 정말 지옥 같아요. 이런 말 하면 제가 나쁜 며느리 같지만 정말 지옥 같은 것이 사실이에요. 저희 시아버지 때문인데요, 결혼할 때부터 지금까지 제게 칭찬 한 번 해주신 적이 없으세요. 외동아들인 저희 남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언제나 제가 본인 아들에게 부족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계시죠. 금방 돌아가시겠지, 하고 참으면서 살았는데 유전자는 또 장수 유전자를 가지고 계셔서 80이 넘은 아직까지도 정정하세요. 아마 제가 스트레스 때문에 먼저 하늘나라로 갈 것 같아요.


이번 추석 때는 솔직히 아버님 앞에서 울 뻔했어요. 물론 감동받아서가 아니라 너무 열 받아서요. 드시던 산적 꼬치가 목에 걸리기를 달님께 빌기도 했어요. 기도에 음식이 걸려서 돌아가셨으면 좋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냥 아버님께서 조금 고통스러우시면 좋겠다, 지금보다 덜 정정해서 말 좀 그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러던 중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길, 제가 너무 답답해서 라디오에 사연을 보냈다는 거예요. 양희은 씨와 서경석 씨가 진행하는 여성시대라는 라디오 방송인데요, 거기에 제게 쓴 편지를 보냈으니 한 번 들어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니, 좋지도 않은 가정사를 도대체 뭐 때문에 남에게 드러내시는지 모르겠어요. 찹쌀떡 쫄깃한 걸로 골라 시아버지의 기도에 살짝 걸쳐놓고 싶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편 차에서 라디오 다시 듣기를 해봤는데요, 정말 눈물이 펑펑 났어요.


“며늘아, 네가 심성이 좋지 않고 내게 웃음 한 번 보여준 적이 없지만 나는 이제 그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한다. 네 남편은 나의 유일한 아들로 가난했던 내가 온 정성을 들여 이렇게 멋진 남자로 키워놓았다. 하지만 며늘아, 너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아들에 대한 불만을 말하기도 하고 현숙한 아내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구나. 하지만 괜찮다. 너희 딸들, 내 손녀들을 무릎 아픈 네 시어머니가 지금처럼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것도 괜찮다. 다만 나는 네가 내 아들에게 더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렇게 시작한 편지는 본인 아들에 대한 칭찬과 제 욕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물론 점잖은 체하는 말투를 하면서요. 회사에 다니던 본인 아들, 그러니까 제 남편은 결혼을 하고 직장을 그만둬 버렸어요. 그리고 5년 동안 백수 생활을 하다가 저와 같이 공무원이 되었죠. 그 5년 동안 저도 힘들었어요. 아시다시피 공무원 월급이 얼마 되지 않고, 시아버지도 거지 셔서 저희에게 돈 한 푼 줄 형편이 아니셨으니까요. 그래도 저는 남편에게 군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옆에서 뒷바라지하며 시험공부를 도왔는데 도대체 지금 라디오에 대고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아버님, 저도 너무 분해서 이렇게 편지를 썼어요. 양희은 씨가 읽어주는 편지를 들으면서 저는 아버님이 치매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시고, 그것도 그 기억을 그렇게 자기 입맛에 맞게 바꾸시는지… 네이버에 검색을 해보니까 그거 치매 초기 증상이라고 하더라고요. 아버님, 이제 라디오에 사연 보내지 마세요. 가정사를 왜 남들에게 알리지 못해 안달이세요? 그것도 치매 초기 증상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아버님, 어제 찾아보니까 근처에 요양원들이 많이 생겼더라고요. 아버님도 곧 그곳에 들어가셔야 할 것 같아요. 라디오에 사연 보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바깥에서 활동하시면서 뇌에 산소를 집어넣는 것이 더 좋으실 것 같아요.

    

저를 며느리로 두신 걸 후회한다고 하셨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아버님의 며느리가 된 게 너무 후회스러워요. 절대 외동아들이랑은 결혼하면 안 된다는 저희 언니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이미 늦었죠. 아버님, 저희 관계가 회복될 수 있을까요? 아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람이 죽으면 그래도 용서가 된다고 하잖아요? 그렇다고 돌아가시란 소리는 아니에요. 돌아가시면 제가 아버님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해본 소리예요.


여러분, 결혼은 사랑만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절대로 외동아들과 결혼하면 안 돼요. 정말이에요. 추석이 즐거워야 하는데 너무 슬프네요. 여러분은 즐거운 추석 보내셨죠? 네, 그러면 돼요. 여러분만이라도 즐거운 추석 보내셨길 바라요.





에디터 김세라

안녕하세요, 김세라입니다. 스튜디오 크로아상에서 소설과 예술 작품 리뷰를 하고 있습니다. 꾸준히 글을 써서, 언젠가 아마존에 상품 검색을 하듯이 스튜디오 크로아상에서 예술 작품들을 검색을 하는 날이 오도록 만들겠습니다. 제게 있어서 연애는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때 낭만적인 연애를 했던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절대로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아, 소설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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