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것이 때론 설렘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에세이를 지금까지 쭉 읽어온 독자라면 알고 있겠지만, 나에겐 6년을 만난 연인이 있다. 사계절이 6번이나 바뀌는 동안 만나온 이 사람은 때로는 기가 막힐 정도로 변덕스럽고 또 때로는 하나에만 너무 몰두해서 그 집중력에 질려버릴 때가 있을 정도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나에 대한 감정,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변함없이 솔직하고 진실되다는 점에 매료되어 지금껏 오래 만나고 있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진솔한 감정이 변함없다고 하더라도 관계라는 것은 시시각각 변하기 마련이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거취가 달라짐에 따라, 계절에 따라, 요즘 누구와 자주 만나고 어울리느냐에 따라, 최근 어떤 취미에 빠져 있느냐에 따라 사람은 그에 영향을 받아 달라진다. 그리고 이것은 그 사람이 맺고 있는 주변과의 관계에 다시금 영향을 미친다.
그와 나도 마찬가지의 사람이라서 오랜 기간을 만나면서 달라진 각자의 생활과 변해버린 취향을 비롯해 과거에는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을 이제는 무던히 넘기는 때가 많아졌다. 기념일 챙기기 혹은 아무런 날도 아닌데 그저 상대가 좋아할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가방 안에 꽁꽁 숨겼다가 짠 하고 꺼내어 보여주는 서프라이즈 선물도 오랜 시간 앞에서는 점점 잊히는 존재가 되었다.
얼마 전, 함께 산책을 하며 길을 걷다가 꽃이 한 송이씩 포장되어 예쁘게 진열된 꽃집 앞을 지나친 적이 있었다. 그 꽃집은 우리가 자주 다니는 길목에 있기 때문에 매번 지나치는 곳인데, 어떤 꽃이든 한 송이에 만 원이었다. 만 원이 그리 지불하기 어려운 금액은 아니지만, 3일 정도 눈호강을 하면 시듦과 함께 날아가버리는 돈이라 흔쾌히 지불하기엔 망설여졌다. 그래서 그날도 평소처럼 “꽃 예쁘네”라며 남의 이야기하듯 한 마디 툭 던지고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남자 친구가 갑자기 “꽃 한 송이 사줄게. 꽃 좋아하잖아”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 순간 사귀고 6개월쯤 되었을 때 로즈데이라며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건네어 주던 24살의 남자 친구가 떠올랐다. 나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짜릿한 연애사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갑자기 심장이 뛰면서 약간의 설렘이 샘솟았다. 하지만, 동시에 “됐어. 무슨 날도 아니고 한 송이에 만 원은 좀 비싸다”라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말을 뱉고 나서야 의도치 않았지만 남자 친구를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말을 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아뿔싸! 싶었지만 말은 이미 허공으로 사라졌고 남자 친구는 그저 덤덤하게 “그래? 그럼 그냥 가자”라고 말하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꽃이 싫어진 건 아니었다. 남자 친구를 만 원짜리 꽃 한 송이도 사주기 버거운 능력 없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도 왜 그런 손사래가 먼저 튀어나왔을까? 이건 마치 함께 산지 몇십 년 된 부부가 서로를 향해 “선물은 뭘, 됐어. 그거면 애들 책이나 옷 몇 벌 더 사주겠다”라며 거절하는 모습 같았다.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권태로운 커플의 모습이라니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새삼 다짐하고 선언했다. 우리 사이에 격식이 사라진 지 오래고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라 하더라도, 사랑의 호르몬은 이미 바닥을 보였다고 하더라도 상대에게 한 번씩 애정을 보이려는 작은 제스처를 쉽게 거절하고 손사래 치지는 말자고.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오래 사귄 커플이 설렘 없이 권태롭다가 결국 결혼에 골인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될까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이 사람과 오래 행복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니까.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작은 꽃 한 송이가 말할 수 없이 크고 깊은 내 마음을 더 잘 전달할 때도 있으니까.
앞으로 여러분들께 저의 지나온 연애사를 비롯해 제 주변 지인들로부터 들었던 현실감 있으면서도 공감 가는 사랑, 연애, 결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또 여러분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하고 연애하며 그 과정에서 결혼을 고민하고 가끔은 비혼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수많은 보통 사람 중 한 명의 이야기,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