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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Apr 28. 2021

사장님의 태세 전환? 무릎도 꿇었다가, 욕도 했다가

회사는 회사일뿐 가족 같은 회사는 없다

 "김 팀장 못 만났으면 이 사업도 다른 곳 하고 했을 거야. 대응을 너무 잘해줘서 뭐 고민할 것도 없었어"



직장 생활 21년을 돌아보면 내가 열정을 쏟으며 말 그대로 일 자체를 즐기며 성과에 목말라했던 건 30대 때다. 아마도 지금 다니는 직장보다는 전 직장에서 그런 열정을 쏟아냈었던 것 같다. 소프트웨어 보안 시장에 제대로 발을 들이고 처음 재직했던 곳은 보안 소프트웨어를 제조하는 회사였다. 입사하고 좋은 기회로 조금 이른 나이에 팀 리더로서 직책도 부여받았다.


당시 다닌 직장은 제품에 대한 커스터마이즈(Customize) 제안 업무가 내 업무 범위에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고객이 필요로 하는 기능들을 직접 제안하고, 컨설팅한다는 게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이전 직장들에서는 이미 완성형 형태로 만들어진 솔루션들을 고객사에 맞게끔 구성하고, 구축하는 업무가 전부였었다. 이미 완제품 형태의 솔루션들이라 고객이 원하는 방향으로 내가 설계, 제안, 컨설팅을 할 수가 없었다. 고객 요구에 맞게 가능한 구성으로 개발 방향을 잡고, 고객을 설득하는 과정이 당시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고객사 맞춤형 제안을 했을 때 나오는 반응은 여러 가지였다. 정말 만족스러운 얼굴로 금방이라도 도입 의사를 밝히는 고객이 있는가 하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고객도 많았다. 많은 시간을 할애해 어렵게 준비해 갔지만 '수고했다'는 한마디로 다음 미팅일이 정해지지 않는 일들도 숱했다.


제안한 고객사가 매번 수주와 계약으로 이어지면 좋겠지만 사전 영업이 아무리 잘 되었다고 해도 계약의 확도가 조금 올라갔을 뿐이다. 결국 많은 고객사들의 도입 결정에 가장 영향을 주는 부분은 도입 솔루션의 금액이다. 하지만 기술력이 있고, 고객이 생각하는 제안에 맞게 잘 대응한 업체에 조금이라도 더 후한 점수가 가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하는 현실이다. 내게도 이렇게 노력하여 계약한 큰 회사들이 몇 곳 있었다. 계약 후에도 고객들은 사업 계약의 전적인 공을 모두 내게 돌리는 '립 서비스'를 종종 보여주곤 했다.     


  "김 팀장 못 만났으면 이 사업도 다른 곳 하고 했을 거야. 너무 잘 대응해 줘서 뭐 고민할 것도 없었어"


하지만 이렇게 열과 애정을 쏟으며 일했던 곳도 결국은 회사고, 그냥 직장일 뿐이었다. 5년 동안 쏟아부었던 내 청춘의 열정과 애정을 애증과 후회로 만들어버린 일이 생겼다. 그 일은 내가 퇴사를 결심하고, 사직의 의사를 내비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이후부터였다. 30대 열정을 불태웠던 곳이라 떠나기로 마음을 먹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고, 말을 꺼내기까지도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스스로를 불편하게 했다.


 "본부장님, 저 이제 함께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음 달까지 일하고 정리하겠습니다"

 "응! 갑자기 왜? 신상에 무슨 일이 있어?"

 "다른 회사에서 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무래도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예전 하던 일로 돌아가게요"

 "흠... 며칠만 더 생각해 보고, 그래도 마음 바뀌지 않으면 다시 얘기해 줘. 내가 대표님께 보고할게"

 "네, 감사합니다"


그날 면담 후에도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았고, 이미 면접을 보고 입사일을 결정했던 곳이 있던 터라 며칠 뒤에도 같은 답변을 들고 본부장에게 찾아갔다. 결국 본부장은 내 결정이 번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대표에게 내 의사를 전달했다. 본부장이 대표에게 보고한 이후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영업 부서 회식이나, 회사 전체 회식이 아니고서는 회식에 참석하지 않던 대표가 우리 팀 회식에 함께 하는 일이 생겼다. 게다가 퇴사 결정 후 식사 한 번 하자고 자리를 함께 했던 다른 팀 회식자리에도 어김없이 대표는 모습을 보였다.  그냥 함께 자리한 것이 아니라 내 옆 자리에 앉아 '아쉽다', '수고했다'는 말 뒤에 끊임없이 나를 설득하고, 회유했다. 회사에 남아달라고.

이렇게 해도 내가 흔들리지 않자 결국 대표는 특단의 조치를 썼다.  어느 날 대표실로 오라고 해서 들어갔더니 대표는 자신의 방문을 닫고 회의 탁자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나를 앉혔다. 


 "김 팀장, 그렇게 꼭 그만둬야겠어. 내가 당신 수술할 때 수술비도 내 돈 가지고 내줬잖아"

 "대표님, 죄송합니다. 수술비는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당시 급여도 몇 달째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홍보팀장에게 개인적으로 얘기한 겁니다. 사실 홍보팀장이 안타까워서 대표님께 얘기한 것이지 제가 대표님께 수술비 해달라고 말씀드린 적은 없습니다"  

 "흠, 지금 김 팀장이 몸 담고 있는 사업부 매각 중인데 제발 매각되고 그 회사 가서 퇴사하면 안 되겠어?"

 "죄송합니다. 대표님. 그때까지 제가 기다릴 수가 없어요. 입사하기로 한 회사 입사일도 많이 미뤄놔서요"

 "(무릎을 꿇으며)나 좀 살려주라. 김 팀장"

 "정말 왜 이러세요. 죄송하지만 정말 안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무릎까지 꿇으며 매달리는 그를 보며 난 당혹스러움과 두려움을 함께 느꼈고, 그 순간 수술부위 통증만 아니었으면 함께 무릎을 꿇고 빌고 싶은 마음이었다. 제발 나를 놓아 달라고. 끝까지 제안을 거절한 내게 그의 보복은 그날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기술 담당이었던 내 업무의 인수인계를 경영관리실 총괄 이사에게 인수받도록 지시를 한 것이다. 게다가 관리실 직원들 모두가 들으라는 듯 관리 이사에게 제대로 인수받으라며 급기야 나를 마치 몰래 도망가는 도둑놈 취급까지 했다.


퇴사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일주일 전에는 '네가 대단해서 잡은 줄 아냐', '너 같은 애들 널리고, 널렸다', '너 거기 가서 잘 되게 둘 거 같냐'는 등의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내 뜨겁던 열정과 애정을 다했던 회사에서 그런 끝을 보고 나니 허탈함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일시적으로 언어장애 증상이 왔고, 일주일이나 증상은 계속됐다. 병원에서는 아마도 심한 충격 등으로 생긴 일시적 증상인 듯 하니 안정을 취하면 다시 나아질 거라는 얘길 들었다. 사나흘쯤 지나자 어느 정도 완화는 됐지만 다시 경험하기 싫은 일이었다.


그렇게 난 회사를 떠났고, 그 회사는 내게 애정하는 회사에서 '애증'하는 회사로 남았다. 5년을 다녔지만 그 이후로는 10년간 다시는 그 회사로 발길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당시 함께 다녔던 회사 직원들의 경조사 때 가끔씩 그분을 뵀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인사만을 하고 지나쳤다.




가족 같은 회사를 표방한다고 슬로건을 내거는 회사들을 많이 본다.  회사 입장에서 새로운 인재, 함께하는 직원들에게 정으로 호소하는 방법일 것이다. 개중에 가족과 같은 회사를 진실로 꿈꾸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회사의 규모가 커지고, 정상적인 회사로 성장해 나가다 보면 '회사'는 '회사'여야 하고, '가족'은 '가족'일 수밖에 없음을 배우게 된다. 친한 친구 혹은 형제간에 동업을 하다가도 마음이 맞지 않아 틀어지고, 갈라서고 하는 이유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진짜 가족이나, 친구 간에도 이런 일이 생기는데 하물며 사회에서 만난 사이끼리 가족처럼 지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회사에 너무 많은 애정과 열정을 쏟아 넣지 말아야 한다. 회사는 단순히 회사일뿐이다. 회사가 내가 될 수도 없고, 회사 동료가 내 가족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언제든지 갈라서고, 틀어질 수 있다는 것을 늘 준비해야 한다. 마음의 상처는 회사가 아닌 내게 오는 것이기에. 당신을 지킬 마음의 준비는 항상 하고 있어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가족 같은 회사 동료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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