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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Nov 29. 2019

오늘 아내를 위해 휴가를 냈어요

우리 부부가 살아가는 법

누군가 이야기했어요. 우리의 일상이 더 행복해 보인다고.

'난 아내를 위해 오늘 휴가를 냈어요.'


우리 부부는 결혼 19년 차 중견 부부다.

어릴 적부터 아내와 연애를 오래 하다 결혼해서 연애기간까지 합하면 25년이 되어간다. 어떤 이들은 결혼은 무덤이고, 결혼하면 환상이 깨진다고 하지만. 난 결혼을 하고 지금까지 아내와 25년째 연애를 하고 있다.  


 결혼 생활이 거의 20년이 되어가는 동안 우리에게도 부부싸움, 고부갈등, 육아문제 등 남들이 겪는 사건, 사고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다만, 이런 문제에 유연하게 대하는 태도를 보인 아내와 무언가 냉랭하고, 불편한 분위기를 절대 싫어하는 내가 만나서 '파이팅'을 하더라도 길게 가는 일이 없었고. 이런 두 사람의 성향이 잘 맞아 하루 이상 감정을 끌고 가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동갑내기이고, 대부분의 40대 중반 결혼 19년 차 정도 되면 기념일 등을 잘 챙기지 않게 된다. 나도 핑계 같지만 평소에도 아내와 연애하듯이 잘 지내서 기념일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올해는 어머니 병세가 더 안 좋아지면서, 아내의 몸과 마음은 많이 힘들었고, 아내도 나도 한창때가 아니어서 한해, 한해 건강문제로 삐걱되는 일이 많이 생겼다. 하긴 큰 병은 내가 전부 앓아와서 아내는 잔병치레 앓는 게 고작이었고, 늘 날 간병하느라 이래저래 고생이 많은 나날이었다.

2019년 11월 초, 가을이 저물어 가는 어느 날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저녁 식사하는 자리에서 슬며시 자기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고, 다들 생일 선물 준비하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평소의 아내답지 않은 너스레였다. 그래도 아내가 이야기한 덕에 생일이 10일도 채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고, 매일 연애하는 기분이라고 얘기하면서 정작 애인(아내) 생일도 못 챙길뻔한 나의 무심함에 마음속으로 조금 화가 났다. 난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티 나지 않게 아내에게 물었다.


"당연히 생일 선물 준비하려고 했죠. 혹시 갖고 싶은 거 있어요?"

"딱히 생각하고 있었던 건 없어요. 생일 전에 얘기할게요."


  내심 아내에게 잘 물어봤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내 통장 잔고가 그때까지 버텨줄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아이들에게도 엄마 생일 선물 얘기를 꺼내고, 따로 하지 말고 함께 돈 모아서 엄마 필요한 걸 해주자고 동의를 얻었다. 그날 밤, 책을 보다가 아내에게 넌지시 다시 그 생일 얘기를 꺼내 봤다.

 

"당신 생일날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기왕이면 당신 먹고 싶은 걸로 골라요."


마음으로는 고생한 내 아내, 생일날 만큼이라도 항상 노래하던 초밥뷔페나 장어 같은 걸 먹고 싶다고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내심 기대해 봤다. 하지만 아내의 소원은 너무도 소박하고, 현실적이었다. 아니 현실적이지 못했다.


"그럼, 난 생일날이라도 삼시세끼 밥 안 하고, 하루라도 남이 차려주는 밥 먹었으면 좋겠어요."


참고로 아내의 생일은 돌아오는 월요일이었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19년 나와 살면서 우리 가족 삼시세끼 걱정하며 수많은 밥상을 차려오느라 고생한 아내의 마음이 느껴졌다. 아내의 그 말에 난 빙긋이 웃으며 '정말 그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출근해서도 아내의 그 말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고, 다음 주 월요일에 있을 업무 스케줄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미리 처리해야 할 일들도 있었고, 미루어야 할 일도 있었으나 아내를 위한 하루가 내게는 소중했고, 기뻤다. 그날 오후 결제 시스템에 연차 휴가 품의를 신청했고, 매니저의 신속한 처리로 퇴근 전에 휴가가 승인이 되었다. 아내에게는 금요일 출근 때까지는 생일 연차 휴가 얘기를 하지 않았고, 금요일 오후에는 아이들 돈과 내 통장 잔고를 탈탈 털어 기프트 카드를 은행에서 구매했다.

   금요일 저녁 식사자리에서 난 아이들과 돈을 모아 생일선물을 준비했다고 기프트카드를 전달했고, 아내의 좋아하는 모습에 흐뭇해졌고, 월요일 생일날 좀 더 특별한 선물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아내는 뭔가 의뭉스러운 걸 감추고 있느냐고 빨리 실토하라고 이야기했지만 난 월요일에 이야기해주겠다고 둘러댔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아내를 위해 미역국을 끓이고, 밥 준비를 했다. 아이들과 아내를 깨웠고, 아내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출근 안 해요? 늦지 않았어요?"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아내는 나에게 물어봤고, 난 어깨 힘 '팍' 주며 아내에게 답해줬다.

   "응, 나 오늘 회사 안 가도 돼요. 여보 생일이잖아요. 하루 휴가 냈는데, 오늘 뭐하며 놀까요?"

 아내는 마치 딸아이가 놀이동산 가자고 할 때만큼이나 함박웃음을 지며 좋아했고, 난 이런 아내의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휴가 내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난 아내와 외출 준비를 했고, 특별할 것 없는 40대 중년 부부의 데이트를 즐겼다. 맛있는 것을 먹자고 했더니 굳이 쌀국수를 먹고 싶다는 아내의 고집에, 베트남 쌀국수로 점심을 먹고,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마지막 가는 가을이 아쉬워 호수공원에 나가 가벼운 산책을 했다. 우린 산책을 하는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얘기, 저 얘기하며 또 서로 장난도 쳐가며 즐거운 오후 한때를 보냈다. 물론 저녁도 아이들과 함께 집 근처에서 맛있게 저녁을 먹었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케이크를 사서 생일날의 마지막 피날레를 케이크 커팅과 맥주 한 잔으로 마무리했다.

난 그날 작지만, 아주 소중한 아내의 생일 소원을 들어주었다. 살다 보면 가끔은 그냥 지나가기도 하고, 간단하게 선물만 하고 지날 수도 있겠지만 그날의 작은 소원으로 시작된 하루가 내게 준 선물은 그 어떤 것보다 소중했다. 김민식 PD가 어느 강연장에서 아래와 같이 이야기했다는 걸 어느 글에서 봤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가끔씩 가는 먼 해외여행보다 자주 찾는 주변 산책길, 등산 등이 오히려 더 많은 행복들을 쌓이게 하는 거 같다고.  난 항상 빈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아내의 생일 휴가와 같은 이벤트는 가끔은 행복도 강도가 필요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매년 아내의 생일마다 이 작은 소원을 들어줄 충분한 용의가 생겼다.  

난 앞으로도 아내를 위해 휴가를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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