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성공을 이루거나, 말도 안 되고,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목표를 달성했을 때 종종 하는 말이다. 가끔은 맞닥뜨리는 현실에서 이런 일들을 경험하고는 한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에서 성공 신화를 이루는 1퍼센트의 성공담의 주인공 같은 경우는 아니더라도 내 시선에서는 충분히 무에서 유를 이룬 것과 진배없다. 아내가 꾸민 아파트 화단 얘기다.
우리가 처음 맞이한 아파트 화단은 잡풀로 무성한 가꾸지 않는 빈 땅이었다. 그나마 봄이 되면 찾아오는 철쭉꽃 때문에 화단에 꽃이 아예 없지는 않은 정도였다. 이런 땅에 아내가 풀을 베어내고, 꽃씨를 심기 시작한 건 4년 전부터다. 생기가 없던 어두운 얼굴의 땅도 혈색이 도는 사람 얼굴처럼 하루가 다르게 생명력이 돌기 시작했다.
1년차 화단
처음에는 풀을 베어냈고, 딱딱한 돌이 곳곳에 박혀있던 척박한 땅을 호미와 작은 삽으로 솎아내고, 이곳저곳에서 공수해온 흙으로 생기 없는 민낯 이곳저곳을 화장하듯 조금씩, 조금씩 메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내를 따라 아파트 화단을 꾸미는 게 고되고, 힘이 들었다. 하지만 아내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은 일이었고, 차츰 익숙해지니 당연히 해야 할 내일인 양 열심히 아내를 도왔다.
흙을 새로 사다가 채워놓고, 꽃씨를 뿌리고, 집에서 열심히 물을 채워와 심어놓은 꽃씨에 물을 줬다. 아파트 청소하시는 아주머니 도움으로 작년부턴 이런 수고가 줄긴 했지만 여러 번 물을 길어 집과 화단을 왕복하는 일은 만만치 않은 노동이었다. 3월부터 시작했던 꽃씨 심기는 처음엔 이곳에 씨앗이 제대로 뿌리를 내릴까 의문도 들었지만 척박한 땅을 이리저리 가꾼 우리들 정성 때문인지 햇살 따뜻한 봄이 오자 하나둘씩 그 결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튀어 나는 새싹들을 보며 우리 아이들 살피듯 조석으로 화단 앞을 지나다니며 한순간도 놓치기 아쉬워 매일 눈에 담았고,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모습에 뿌듯함까지 들었다. 그렇게 봄이 만연하는 4월이 되자 이르게 꽃을 보이기 시작하는 녀석들도 생겼고, 생각보다 더디게 자라는 녀석들도 제법 많이 눈에 띄었다.
첫해에는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꽃들이 웃자라기도 하고, 꽃송이도 생각보다 튼튼하게 자라나지 못했다. 아파트 화단에 흙도 너무 척박해서 영양제도 수시로 넣었고, 지렁이 흙도 가져다 나르면서 아내는 아파트 화단에 진심이었다.
2, 3년차 화단의 모습
한해 그리고 또 한해를 거듭할수록 화단은 아내의 정성을 양분 삼아 풍성해지기 시작했고, 다년생 위주로 뿌렸던 꽃씨들은 3년 차가 되자 제대로 자태를 뽐내기 시작했다. 이런 화단의 존재를 이제는 익히 아는지 얼굴이 낯이 익은 주민분들은 화단에 꽃이 너무 이쁘다고 아내에게 감사 인사를 종종 건넸다. 그도 그럴 것이 아파트 중앙 통로에 떡하니 위치한 화단이어서 지나다니는 주민분들의 발길을 머물게 한 것도 여러 해가 되었고, 작년부터 화려함까지 더해져 가끔은 아파트에 살지 않는 주변 주민들 시선까지 붙들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파트 화단이 평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3년 차였던 작년에는 주민 한 분의 민원으로 수시로 꽃이 뽑히기도 했고, 민원인은 화단에서 일하는 아내에게 안 좋은 소리까지 하며 조금은 불편한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아내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마음 상해하기도 하고, 종종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3년을 가꿔온 화단이어서 올해도 여전히 진심을 다해서 꽃들을 돌봤다.
2022년 6월 화단의 모습
올여름은 해바라기를 닮은 노란빛의 루드베키아와 핑크빛이 너무 고운 국화과의 에키네시아가 말 그대로 화단을 빼곡히 채웠다. 작년에는 키만 쑥 자라나고 실하지 못해서 꽃이 모두 땅을 바라봤던 녀석들인데 우리 인생의 시련 같은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뚫고 올라온 녀석들이어서 그런지 올해엔 줄기도 튼튼하고, 해바라기과의 특성을 제대로 살려서 고개는 빳빳하게 하늘을 본다. 두 녀석들 사이로 올해는 하얗고 고운 자태에 향기까지 그윽한 백합이 신의 한 수다.
한쪽에는 작년에 이어 군데군데 노란색, 붉은색, 핑크색 등 형형색색 백일홍까지 보이니 멀리 위에서 바라보면 커다랗고 예쁜 꽃다발 같이 보일 듯싶다. 아내가 예쁘게 가꾸고 있는 이 화단은 계절마다 변신을 거듭한다. 올해도 아내의 매직은 진행형이다. 무더운 여름이 가면 하얀색 구절초, 보랏빛 풍성한 쑥부쟁이와 고운 자태의 다양한 색의 국화가 또 한 번 아내의 화단을 바꿀 것이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 아내가 가꾸는 화단의 변신도 무죄다. 오늘도 아내가 정성스레 꾸며놓은 화단 앞을 머무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럴 때마다 왠지 내가 뿌듯한 마음이 들곤 한다.
사람도, 꽃들도 사람 하기 나름이다. 올해도 아내의 매직은 나를 놀라게 하고, 아파트 주민들을 행복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