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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Jun 15. 2021

수지맞은 날.

 한 달에 두, 세 번 이마트 캐주얼 코너에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나간다. 경기가 안 좋다 보니 매장이 거의 1인 근무를 하는데, 점장님이 일이 있어 일찍 퇴근하는 경우 내가 저녁시간에 근무하게 된다. 돈은 얼마 안 되지만 집에서 놀고 있기엔 그렇고 동생네 1주일에 두 번 가서 저녁 차리는 일만 하기에도 내 사정이 여의치 않아 몇 달째 이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일하는 매장의 옆 매장 점장님이 급한 볼일이 있으시다고 내게 오후에서 저녁까지 일을 부탁하신다. 남성정장은 한 번도 판매를 해본 적이 없어 머뭇거리는데 자리만 지켜달라고 부탁하시는 바람에 얼떨결에 승낙을 하고 말았다. 사실 내가 겁이 좀 많다. 누구든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두려움이 있지만 낯을 많이 가리고 지극히 소심한 내가-나이도 먹을만치 먹었는데도 뻔뻔함과는 거리가 멀다. 의류 판매 아르바이트를 그래도 몇 년 해봤는데도 아직 손님들을 대하는 게 영 어색하다. 일머리도 없고 영 판매 스킬이 안느는 것 보면 이쪽에 재주도 없고 적성도 안 맞지만 그렇다고 내 나이에 전업주부였던 내가 할 일이 마땅치 않아 발을 들여놓았다.

그래도 더러 나의 순진한(?) 어리바리한 스타일을 좋게 봐주시는 고객님들도 계시니 내가 최근까지 시간제나마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한번 본 고객과 고객의 특징을 잘 기억하는 눈썰미가 있어 단골 고객님들에게 먼저 다가가 안부를 묻는 정도는 내가 잘하는 일이니- 내가 영 쓸모없는 판매원은 아닌데... 아무튼 그래도 사람을 대하는 일이 내게 쉬운 일만은 아니니 늘 부담감은 있다.



 오후 3시 10분 전에 남성정장 매장에 도착했다. 참 나의 장점 중의 하나는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것이다. 혹자는 뭘 기본을 같고 얘기하냐고 핀잔을 줄지 몰라도 나는 일이던 개인 간의 약속이던 상대를 기다리게는 하지 않는다. 이것이 고용주와의 관계에서 기본적으로 나를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게 만든 힘이었다.

 점장님이 급하신지 내가 매장에 들어서기 무섭게 겉옷을 입으시며 "편하게 그냥 놀다 가세요. 저녁 드시고요. 여기 식권요~"하고 식권만 내밀고 사라지신다. 제품에 대한 설명이나 일러둘 말도 안 하시고 부리나케 매장을 떠나신다. 잠시 난감해하다 이내 매장을 둘러본다. 진열된 옷 이외의 품목별, 사이즈별로 여유분을 어디에 정리해 두셨는지 한참을 헤매며 찾았다.

 

 요즘 유행하는 아재 꽃무늬 셔츠도 신기한 듯 구경하고 잘빠진 슈트도 이리저리 살펴보며 한참을 둘러봐도 흐른 시간은 채 한 시간이 안됐다. 평일이고, 남성정장은 날이 더워져 지금 찾는 사람이 별로 없기에 그야말로 지루한 시간과의 싸움이다. 남은 다섯 시간이 참 길게 느껴졌다.

 서서 스트레칭을 하기도 요즘 슈트의 트렌드를 보며 아들 생각이 났다. 한벌 사주고 싶어 요즘 양복값이 얼마인가 가격표를 들여다보았다. 허걱 눈이 보배라 마음에 드는 것마다 프리미엄이라고 꼬리표 붙여진 것이니 가격도 만만치 않다. 아들이 성인이 되고는 경제적으로도 완전히 독립하였고 빠듯하게 지 살림을 꾸려가다 보니 제대로 된 양복 한 벌이 없다. 내 사정도 별로 낫을 게 없으니 슈트 한벌 사준적이 없다. 매끈한 슈트를 보고 만지작거리다 다음을 기대한다.



 두 시간을 꼬박 서서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니 등이 뻐근하다. 4층 매장 전체가 오고 가는 사람이 별로 없다. 매장 데스크에 전화번호를 적어 붙여 놓고 이른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올라갔다. 저렴한 직원 식당이지만 어쩌다 운이 좋으면 간혹 특식이 나올 때도 있다. 원래 5,6시간 시간제에는 식사 제공을 안 하는데 점장님이 인심이 후한분 같다. 옆 매장이라 내가 이마트 나올 때 인사만 하던 사이였는데...  점장님이 배려가 감사하다.

 쫄면과 바싹 돈가스, 장국에 샌드위치가 석식 메뉴이다. 튀긴 음식에 빵이라(원래는 좋아하는 음식이지만 건강을 생각해 튀긴 음식은 잘 먹지 않는다.) 조금 망설이다 아주 조금만 식판에 돈가스와 쫄면과 깍두기를 담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갓 튀겨진 돈가스가 정말 바싹하다. 점심에  부실하게 먹었는데 시장이 반찬이라 남은 음식들도    깨끗하게 비웠다. '이른 저녁이니 칼로리가 높은 쫄면이나 돈가스도 괜찮을 거야.'


 

 몸을 뒤틀어 보고 시간을 본다. 일곱 시가 조금 넘었다. 나른함에 잠시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는데 손님 두 분이 매장으로 들어선다. 매장이 4층의 구석에 위치하고 있어 매장에 들어서는 분들은 구매 목적이 분명하신 분들이다. 가볍게 외출할 수 있는 셔츠를 찾으시고 옷을 고르신다. 푸른색 바탕의 하얀 도트 무늬의 셔츠 사이즈 105호 사이즈를 찾으신다. 얼른 점장님께 전화를 걸어 물건을 둔 위치를 여쭤보고 고객님께 찾아 드렸다. 휴~ 오늘 나의 첫 손님이다. 손님이 없어 조바심 났던 마음에 좀 여유가 생겼다.

 다시 멍 때리기로  시간을 보내다 내일 조카들 저녁 메뉴를 떠올려 본다. 내가 가는 날은 별식을 해주고 싶은데 메뉴 고르는 게 쉽지만은 않다. 상상력의 한계를 느끼며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심해 보지만 생각이 나질 않는다. 오랜만에 "닭볶음탕??" 당장 큰 조카한테 톡을 보낸다. 얼마 뒤 "ㅇㅋ"이라는 답이 왔다. 큰 숙제를 하나 해낸 느낌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 다른 사람들의 닭볶음탕 요리와 비교해 보고 준비할 재료를 미리 동생에게 알려줬다.


 적막하고 고요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까 맞이했던 셔츠 손님이 내가 근무하는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 손님이었다. 6시간 거의 서서 근무했던 탓에 다리랑 허리가 뻐근하니 아프지만 하루의 일을 무사히 마감한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든다. 문득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귀가했을 아들과 아들을 반갑게 맞이할 마루가 떠오른다. 마루가 있어 아들이 외롭지 않을 것 같아 참 다행이다.


 

 버스 정류장을 코 앞에 두고 걸어가는데 막 집으로 가는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선다. 젖 먹던 힘을 다해 뛰어간다. 간신히 버스에 올라타 가쁜 숨을 몰아 쉬지만 십여분을 기다리지 않고 적절한 타이밍에 승차했으니 그럭저럭 운이 좋은 날이다.

 불 꺼진 집으로 들어서  먼저 꼬마(내가 키우는 아니,  스스로 알아서 잘 자라는 산호수와 나한송) 에게 다녀왔다고 눈도장을 찍는다. 가만 다가가 잎새들을 살며시 만지며 "잘 자라줘서 고맙다. "하고  인사를 한다.

 조용한 방에 알림음이 정적을 깬다. 은행 계좌의 입출금을 알려주는 알림 소리이다. 6만 원이 오늘 내가 번 돈이다. '우와, 시급을 만원으로 계산하셨네... ' 이래저래 오늘 하루 횡재한 느낌이다. 살면서 오늘 같은 꿀알바만 내 인생에 있으면 살림살이도 확 필 것 같은데 흐흐. 붓고 아픈 다리조차 갑자기 가볍게 느껴지고 힘이 불끈 솟는다.


 

 비가 온다. 보슬비다. 비 오는 날은 왠지 느림의 시간에 가깝다. 미래보다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추억하고 떠올린다. 오늘도 명희 씨 카페의 창가 그 자리에 앉아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오늘은 내게 어떤 행운이 있을까 기대해본다.

 

 엄마가 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누구나 똑같은 양의 복이 있다고... 먼저 불행의 공을 뽑았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고. 언젠가는 내게도 행운의 공이 나올 거라고. 엄마의 진심 어린 위로가 가슴을 파고든다. 어쩌면 어쩌면 이미 행운의 공은 내 손에 쥐어진 것 아닐까. 왠지 자꾸 웃음이 나온다. 행복한 비 오는 날 오후가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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