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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Sep 26. 2021

삶을 지탱하는 사랑의 힘.

 

 중2짜리 남학생인 조카가 학교에서 평소보다 한 시간쯤 늦게 귀가해서는-집에 오자마자 가방을 열더니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 왔다고-이것저것 음식들을 꺼내놓는다. 구운 달걀 3개와 샤인 머스캣 한 송이, 수박 음료 세 병, 과자 두 봉지를 꺼내더니 "이모 드시고 싶은 거 드세요." 하고 자랑스럽게 간식거리를 내민다. 명절 때 친척들에게 받은 용돈으로 내게 크게 한턱을 내는 조카가 너무 귀엽기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해서 볼을 살짝 꼬집고 엉덩이를 토닥여주었다.

 

 평소 어른들께 받은 용돈을 꼬박꼬박 저축하는 알뜰한 조카의 나를 위한 큰 씀씀이는 나를 감동케 했다. 자기 용돈은 철저하게 모으면서 비싼 간식은 엄마, 아빠의 지갑을 통해 해결하려는 녀석인데...  지난번에도 이모 선물이라고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들고 왔는데... 누가 나를 이렇게 열렬히 진심을 다해 사랑해줄까 생각하니 코끝이 찡한 행복감이 내 가슴을 가득 채운다.


 내 배 아파 낳은 자식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직장 다니는 동생을 대신해 돌봐와서 그런지 보통 이모와 조카 사이 그 이상 남다르다. 나는 결혼을 좀 이른 편에 해서 아들은 이미 서른이 된 성인이지만... 고1, 중2짜리 조카들은-늦둥이 내 아이들 같은 느낌?-그냥 대견하고 그냥 사랑스럽다. 꽃이 그냥 꽃이어서 아름다운 것처럼 조카들도 그 존재 자체로 눈이 부신 생명 그 자체이다. 

 


 

 창문 너머 바라본 나뭇잎들이 벌써 울긋불긋 가을 옷을 입고 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도 제법 서늘하다. 계절은 어김없이 흘러 가을이 무르익고 있다. 작은 조카가 챙겨 온 만찬은 사실 단 것을 안 좋아하는 내게는 일 년에 한, 두 번 먹을까 말까 한 음식이지만, 이런 내 마음을 눈치 안채 다과상에 한상 차려 조카와 마주 앉아 이모가 좋아하는 간식들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정말이냐고 묻는 조카의 표정이 뿌듯한 행복으로 환해진다.


 사실 요즘 명절 후유증으로 며칠 좀 울적했다. 늘 혼자에 익숙한 나이지만 계절을 타는지 아니면 환절기라 더 피곤한 몸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슬프고 우울한 감정이 불쑥불쑥 올라와 힘들었다. 아들이 추석 전날 와서 하룻밤 묵고 갔지만 명절 연휴가 길다 보니 새삼 혼자서 밥 먹고 생활하는 일이 못 견디게 서러워 좀 청승을 떨었다. 떨어지는 낙엽에서 낭만을 보기보다는 황혼 녁의 쓸쓸함과 인간의 유한함을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삶의 근원적인 슬픔에 빠져들었다.


 "저녁으로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이모가 다 해줄게." 하고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조카는 이모가 해주시는 건 다 맛있어요." 하고 엄지 손가락을 추켜 세운다. 조카의 진심 담긴 나를 향한 무한 애정에 조카를 꼭 안아줬다.

 


 

 동생이 퇴근해서 들어서며 우리들의 파티 상차림에 깜짝 놀라며 자초지종을 묻는다. 내가 깜찍한 조카 녀석의 나를 위한 서프라이즈 선물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니 동생이 깔깔 웃으며 부럽다는 듯이 아들의 엉덩이를 닥인다. 하긴 우리 짠돌이 조카는 지 엄마, 아빠에겐 어리광장이 막내 역할을 충실히 해 온-집안에서 자린고비였으니 동생이 놀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이다. 아끼는  용돈으로 나를 위해 음식을 준비했을 조카의 마음이 고마워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이고 우리 막내아들한테 큰 선물 받았지~ 어쩜 내가 좋아하는 것만 골라 왔을까." 하며 동생에게 한 눈을 찡긋 감으며 말을 하니 옆에 있던 조카가 뻘쭘한 표정으로 수줍게 웃는다.

 아기 때부터 돌봐주던 조카가 어느새 커서 내게 사랑을 표현하고 주는 것이 기특하고 고마워 한참을 쳐다보니 녀석이 내게 손하트를 만들어 날린다.

 


 

 어느새 밤이 내린 길을 걷는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집으로 가는 길을 환하게 비춰준다. 아파트 담장 따라 흐드러지게 핀 들국화와 코스모스가  달빛 아래 고운 춤을 춘다. 가을밤이 무르익는 하루다.

 하루를 오늘도 무사히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인적 없는 집안에 꼬마 화분 하나가 나를 반긴다. 변함없이 나를 반기는 꼬마가 사랑스러워 작은 잎들을 쓰다듬으며 인사를 한다. 살아있는 생명이 주는 위로에 내 마음이 다시 환하게 빛난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울적했던 내 마음을- 오늘은 귀염둥이 조카와 꼬마 화분이 보듬어 주었다. 이 모든 크고, 작은 사랑의 손길이 결핍과 상처투성이인 나를 치유하고 다시 꿈꾸게 한다.

 

  소곤대던 별빛과 달빛조차 스러져 잠든  밤에 눈을 감는다.  내가 오늘 조카에게서 받은 사랑의 힘으로 살아갈 힘을 충전받듯-나의 사랑도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희망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해 보며 어느새 깊은 잠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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