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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낀느 Jun 12. 2024

소리와 밥, 모녀의 고베 여행


난청과 배음     


고베 아저씨 집, 첫날밤.

벽장 안 가득한 이불 중 깨끗하고 모양 좋은 놈으로 골라 이부자리를 꾸민다. 색깔까지 맞추어 딸과 내 이불을 깔고 나니 잠자리가 그럴듯하다. 그림을 그리셨던 아저씨, 젊어서 멋을 많이 부렸던 아주머니, 두 분이 사셨던 집은 격조 있고, 고풍스러운 살림들로 채워져 있다. 낡지만 모양 좋은 책상, 책상 앞의 거울, 낮은 키의 오래된 의자, 색이 바랬지만 느낌 있는 털가죽, 거실의 원탁, 원탁 위 인도식 문양의 테이블보, 날씬하고 긴 램프와 시선을 끄는 소품들이 내 감탄을 차례로 받았다. 


꼬맹이는 곧 잠이 들었지만, 나는 자리가 바뀌면 잠을 못 잔다. 부엌이 창이 없는 공간이라 그런지 아저씨는 팬을 틀어놓으셨다. 꽤 좋은 맨션임에도 난방 시스템이 되어 있지 않아 온풍기를 틀고 자야 했다. 온풍기 소리와 팬 소리가 계속 신경을 거스른다.  

    

새벽 5시 반. 날카로운 알람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새벽에 나는 등산 간다. 살짝 나갈 테니, 너희들은 신경 쓰지 말고 자거라.”

이미 나가셨구나 싶어 일어나서, 아저씨 침대 곁에 있는 알람을 끄고 일어난 김에 화장실에 간다. 컴퓨터가 놓인 서재에서 고개를 수그린 채 옷을 입고 계신 아저씨. 

“안녕히 주무셨어요?”

반가운 인사를 건넸지만, 아저씨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묵묵히 겉옷 매무새만 다듬고 계신다. 나는 가까이가 아니면 소리를 못 들으시는 아저씨의 귀를 깨닫고 조용히 자리로 돌아온다.  

   

“난청이란 모든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게 아니란다. 어떤 특정한 소리를 못 듣는 것이지. 이를테면 자음이 잘 들리지 않아서,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들이 모두 같은 ‘아’ 음으로 들려서 구별이 되지 않는 거다.”


아주 조용한 집 같은 곳에서는 대화가 가능하다. 나는 주로 짧게 묻고, 아저씨가 길게 대답한다. 합리적인 대화법이었다. 혼자 사는 아저씨는 대화와 한국말이 늘 그리웠던 분이시기에.  

   

다음 날 밤, 내 신경을 긁었던 부엌의 팬 소리가 꺼져 있는 것을 알았다. 전날 아저씨는 음식을 만들다 무언가를 태웠다. 냄비가 타 있었다. 씻어 드릴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 그대로 두기로 한다. 그래서 팬을 틀어놓고, 들리지 않아 끄는 것을 잊으신 것이다.      


나는 나이 먹을수록 소리에 민감해진다. 악음(樂音)은 괜찮다. 소음(騷音)에 신경질적일 정도로 인내심이 없어져 버렸다. 최근 흥미로운 이론을 들었다. 사람의 목소리나 악기의 음색이 모두 다른 이유는 배음(倍音)이 있기 때문이란다. 배음이란, 예를 들어 ‘도’ 음을 눌렀을 때, ‘도’ 음 한 개만 소리 나는 것이 아니고, ‘도’ 음의 1.5배, 1/3배, 3/5배, 2배 등 여러 배수에 해당하는 음들 즉, 배음들이 한꺼번에 울리어 ‘도’라는 하나의 음정을 내게 된다. 만약에 이 배음들이 없다면, 우리의 목소리는 라디오의 시각을 알리는 소리처럼 다 똑같아진다는 말이다. ‘도’ 음마저도 이렇게 풍부한 협화음(協和音)으로 울렸던 것이다.


강사가 ‘도’ 음을 피아노로 누르며 물었다.

“도 외에 어떤 음이 들리나요?”

‘쏠이요.’

작은 소리로 혼자 대답했다.

16개의 배음 중, 내 귀는 고작 단 하나의 배음 밖에 포착해 내지 못한다.     


아저씨를 대하면서 종종 소리의 의미에 대해 자문하게 된다. 어쩌면 나는 점점 소리에 대해 편협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소리를 듣고, 소리를 쫓아가지만, 그러면서 소리를 잃을까 두려움이 들기도 하는 지점이다.      


삐약삐약 히메지성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오사카행 아시아나, 기내지에서 읽은 김영하의 인터뷰에서.

“오사카성에 가보셨어요? 그곳에 가면, 어디를 밟아도 마루에서 소리가 나요. ‘삐약삐약.’ 암살자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그렇게 해놓은 거죠. 한데 일급의 닌자들은 그 ‘삐약 소리’가 안 나요. 소리 없이 가서 베어버리죠. 표 나지 않는 문장,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문장, 뭔가 지나간 듯한데 드러나지 않는 문장을 쓰려고 해요. 인물은 좀 더 다양해지지만 문장은 보이지 않게 말이죠.”     


그 삐약 소리는 오사카성에서만 나는 것은 아니었다. 히메지성(姬路城)에서도 삐약삐약, 낡은 성 어디서나 삐약 삐약이 있다. 아니, 이제는 삐약삐약 보다, 삐욕삐욕이나 삐걱삐걱에 가깝게 들린다. 귀 기울여 보시라. 성에는 이제 지난날을 냄새 맡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전시품 제외), 그 삐약 소리를 내는 마루는 지나간 모든 이들의 흔적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어두침침하고 긴 낭하, 일본인 체구의 왜소함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던 폭 좁은 계단, 풍경들을 내다보는 큰 창과 작은 구멍들, 혹은 물구멍들. 성을 끼고도는 길고 긴 겹겹의 도랑들. 이들에게서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옛날 옛날, 한 500년 전 옛날에 센히메(千姬)라는 공주가 살았더래요. 
그녀의 방을 찬찬히 둘러보며 우리는 그랬어요.
“인생을 상당히 즐기며 사신 공주구만.”
센히메란, 그녀의 남자가 천명쯤 되었다는 뜻이래요.     

지난날의 미녀, 지난날에 내린 눈은 지금 어디에 있나.

문과 무, 글과 검이 엇갈려 교차하는 지점이다.

히메지성은 백로성이라는 별칭을 가진 하얀색 아름다운 성이다.     



즐거운 밥     


많이 먹는 것도 아니고 육류나 지방을 과다 섭취하는 것도 아닌데 살을 빼지 못하는 것은, 아이의 분석에 의하면 늘 맛있게 밥을 먹기 때문이란다.

나는 마음 상하는 일이 없는 한 음식을 즐긴다. 무얼 먹을까 골몰하는 것도 즐긴다. 아무렇게나 먹기를 싫어한다. 요리를 잘하고, 요리하는 것을 즐긴다. 사는 재미이다.      


아저씨는 평소에 음식을 드시기보다 재료를 드시는 것 같다. 즉 가공하지 않은 음식 상태를 즐긴다. 아저씨의 부친인 다석 선생의 사상은 내게 너무 어렵지만, 그 어른의 생활에 대해서는 어릴 때부터 많이 들어왔었다.

선생은 여러 해를 하루에 한 끼씩 저녁에 식사를 하셨고, 그래서 자기 호를 다석(多夕)이라 하였다 한다. 세끼를 합쳐서 저녁을 먹는다는 뜻이다. 한 끼도 굶지 못하는 내겐 불가능한 경지이다.     


아이 다섯을 키운 우리 엄마는, 그 아이 하나 낳을 때마다 잃은 칼슘으로 이제 틀니를 하시지만, 젊었을 때는 무쇠장군이셨다. 어린 자식이 남긴 밥 국물까지 싹싹 긁어먹던 70년대 한국의 엄마와 달리, 아저씨 부부는 맛있는 걸 우아하게 즐겼다.      


그래서 아저씨는 우리와 저녁 식탁을 나누는 기대를 갖고 계셨고, 덕분에 우리는 나흘 동안 매일 칼로리적으로, 혹은 여행자에게는 다소 과다한 비용의 저녁을 즐거업게 치러야 했다.     


고베에서의 나흘 저녁 식사 메뉴


1일 

삼 차에 걸쳐 술을 마신 날이다. 휴가니까 좀 그래 봤다. 도착하여 가볍게, 프랑스 와인을 아저씨와 둘이 한 병 마시다. 낯선 종류의 스낵은 냄새가 거슬리지 않으면 맞춤한 간식거리와 안주가 된다. 꼬맹이는 나보다 혀가 고급이다. 다행히 군것질거리가 입에 맞는지 옆에서 차와 스낵을 즐긴다. 늘 그렇듯이 나는 취하지 않을 정도만 마시다. 아저씨는 술친구로 영민이가 그리웠을 거라….     


2일

스시와 맥주를 픽업하여 집에서 먹다. 아저씨가 고등어 스시를 추천하여 처음 먹어 보다.

“일본에서는 고등어 스시 마음대로 먹어도 좋다.”

하지만, 나는 두 어점 먹고 나니 맛이 거슬렸고, 꼬맹이도 먹지 않는다.     


3일

난킨마치(南京町)는 고베의 차이나타운이다. 동서로 약 200m, 좁은 골목길에 음식점과 잡화점이 빼곡 차 있는 모습은 뉴욕이나 홍콩의 뒷골목 풍경과 다르지 않다. 

비가 자박자박 곱게 오던 월요일, 사람도 많이 없어 우리 셋은 우산 쓰고 그 200m를 천천히 구경 삼아 걷는다. 그리고 몸을 돌려 아저씨가 안내하는 식당으로 들어간다.     

담백한 맛의 양념, 뼈도 연해지도록 익히고, 차게 요리한 닭고기와 야채 한 접시, 그리고 해물국수. 곁들여 소흥주(紹興酒)를 처음 먹어 보았는데…, 음, 좋았다. 둘이서 두 작은 주전자를 마셨다.

“이 술은 빨리 취하지만 빨리 깬다. 머리도 아프지 않고.”

사실이었다. 취감이 좋았다.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마시고 싶다. 아저씨가 계산하셨는데, 힐끗 보니 6만 원이 넘는다.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4일

인도카레 집에 가다. 아저씨의 단골식당 중 하나인 고베의 그곳은 인도 사람이 주인이고, 주방장이다. 카레 메뉴가 몇십 가지 되었고, 난의 종류도 하도 많아 뭘 선택해야 할지 몰랐다.

“난이 크기 때문에 하나만 주문해도 둘이 먹을 수 있을 거다.”

마늘 난 하나와 꼬맹이는 닭고기 카레. 이건 좀 평범하고 익숙한 맛이다. 나는 좀 더 비싼 가지+새우카레를 시켰다. 우오! 아주 아주 독특하게 맛있었다. 레시피를 안다면 시도해보고 싶다.      

“오늘은 제가 낼 차례예요.”

“그래라.”

빙긋 웃으시며 기분 좋아하신다.     



도착 삼일째가 되면서, 혜정과 나는 열차 시스템에 익숙해졌다. rapid와 local의 역들을 파악하고, 자유로이 다닌다. 그러면서 도시와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에 흥겨워진다. 이제 낯선 환경이 두렵지 않다. 교통과 친해지고 길을 알면 두렵지 않다.     

2월 7일 오후 고베, 비가 온다. 적당한 피로와 비에 몸이 젖어 들어가서, 꼬맹이와 나는 각각 자신의 플레이어를 꺼내 들고 음악을 듣는다. 나는 곧장 내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지상을 달리는 전철 창 밖을 바라보는 내 안에서 감미로운 피로감이 서서히 녹아가고 있다.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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