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결산
올해는 딱히 한 게 없고 일만 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지만은 않았다. 찍은 사진들을 거슬러보니 올해만 무려 3개국(일본, 미국, 중국)을 다녀왔고, 국내 여행도 고성, 강화도, 영월, 양평, 제주 등등 구석구석을 다녔더랬다. 뭐야, 올해도 상당히 잘 놀았잖아. 뿌듯. 올해도 함께 놀아준 모든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포브스 선정 여자가 싫어하는 남자친구 취미 1위, '낚시'. 낚시 뽐뿌가 나에게도 왔다. 올해 9월 고성 여행에서 무려 꽃게를 낚시로 잡는 짜릿한 손맛을 본 뒤 입문하게 됐다. 11월에는 내친김에 제주도로 배낚시를 다녀왔다. 함께 간 친구의 배멀미 이슈로 만선의 꿈은 다음으로 미루게 되었지만.. 아마 앞으로도 자주 다니게 되지 않을까 싶다. (장바구니에 한가득 낚시 용품을 담아뒀다)
'낚시의 매력이 도대체 뭐냐'고 궁금해할 분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낚시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무엇보다 콘텐츠가 변화무쌍하다. 여름엔 한치, 겨울엔 전갱이, 동해엔 삼치, 서해엔 쭈꾸미 등등. 대상어종에 따라, 계절에 따라 무궁무진한 경험이 가능하다. 그뿐이랴. 낚시를 하면 자연스레 비타민D 합성과 디지털 디톡스와 낮술이 따라온다. 더 제대로 하는 사람들은 '캠낚'이라고 해서 아예 캠핑과 낚시를 한큐에 해치운다. 하나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세상에, 엄청난 고효율 하이브리드 취미가 아닐 수 없다.
참고로, 내가 본격적으로 낚시에 기웃거리게 된 건 유튜버 진석기시대님 덕분이었다. 국/내외 바다를 오가며 낚시와 요리를 하는 콘텐츠인데, 마냥 행복해보이면서도 무해한 그의 '아재미'가 상당히 매력적이다. 모르긴 몰라도, 석기 형님 덕분에 낚시에 입문 예정인 2030 낚린이들이 꽤나 많을 거다. 한번 빠지면 돌이킬 수 없으므로 주의 요망.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여자라면, 남자친구의 구독 목록에 혹시 '진석기시대'가 있는지 살펴보라. 그의 눈이 수산시장에서 반짝인다면, 수상할 정도로 제철 해산물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면, 이미 늦었을지도..
올해의 문제작.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이 영화를 최근 몇 년을 통틀어 가장 재밌게 봤던 영화로 꼽는데 (화려한 출연진 때문만은 아니다), 실제로 평점이나 평단의 반응은 썩 좋지 못했다. 아무렴 어때, 내가 좋았으면 됐지 뭘. 남들의 감상이 무슨 상관이람.
극 중 주인공 만수(이병헌)는 해고된 이후, 재취업을 위해 세 번의 살인을 저지른다. 본인같은 경력직들을 제거하면 자신의 취업 성공률이 올라가리란 믿음 때문이다. 많은 관객들이 이 지점에서 감정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이탈했을 거다. 사실 나도 그랬다. 단순히 잠재적 경쟁자라는 이유로 무고한 이들을 죽이는 주인공에게 감정적으로 공감하기 어려웠다. 취업 성공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목표 달성을 위해 살인이라는 높은 리스크를 지는 선택에도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관객들은 계속 '어쩔 수가 없다'를 되뇌이는 만수와 대립한다. "아니, 어쩔 수가 없지 않잖아?"
하지만 그런 서사적 빈약함(?)을 극적 허용으로 눈감아줄 수 있다면 영화를 더욱 재밌게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단순한 연쇄 살인 이야기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세 번의 살인은 완전범죄로 끝나고 만수는 결국 취업에 성공한다. 하지만 동시에, 평생 함께할 가족들에겐 균열이 생기고 만다. 절대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렇다면 만수는 성공한 걸까, 아니면 실패한 걸까? 나는 이처럼 영화가 성공과 실패의 모습에 대해 교차편집하는 방식이 좋았다. 그러면서 개인이 아닌 사회를 겨냥하는 방식도 좋았다. 무언가를 처절하게 달성하고 나면, 동시에 무언가에 처참하게 패배하고 마는 사회. 그 속에서 사는―'어쩔 수가 없는'―인간의 삶에 대해 말하는 것 같기도 했고.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이 있다면 한번 시도해 보시길 추천. 그리고 만약 영화를 이미 보셨다면 아래 인터뷰를 꼭 보시길 추천. 신형철 평론가와 박찬욱 감독의 한 시간짜리 대담인데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작품 같다. (인터뷰가 이렇게 창의적일 수 있다니!) 독특하고 실험적인 메인 요리를 먹은 뒤 완벽한 디저트로 마무리하는 느낌이랄까. 강추.
아마 나의 오래된 구독자 분들은 아시리라. 나는 한 명의 한의사로서 한의학이 불필요하게 오해 받는 현실에 대해 꽤나 진지한 변호문을 써왔다는 사실을. (에세이, <한의학이 비과학이라는 누명>) 3년 넘게 스타트업에 다니고 있는 것도 '한의원의 진료 환경을 바꾼다'는 미션에 근거했다는 사실도. (브런치북, <스타트업으로 간 한의사>)
올해는 그런 미션에 대해 구체적으로 실현한 과업이 있어 소개한다. 이른바 '아큐렉스 프로젝트'. 아큐렉스Acurex 라는 브랜드는 '침Acupuncture'의 과학화와 대중화를 위해 탄생한 브랜드다. 왜 브랜드가 필요하냐고? 치과의 경우, 사람들이 '임플란트'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오스템Osstem'은 알고 있다. 하지만 한의원에서 그런 브랜드가 있었나 하면... 여태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환자들이 여전히 '침은 일회용을 쓰나요?' '약침이 뭔가요? 침에 약을 발라서 놓나요?' 하는 질문과 의구심을 가진다는 사실에 대해 뼈아프게 생각한다. 내 몸에 들어가는 건데 100% 믿을 수 없다면 단 10분도 견디기 어려울 테다. 그리고 그런 미묘한 신뢰도의 차이가 임상적인 치료 효과에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책, <고통의 비밀>)
[일반인을 위한 토막상식]
'침' 이라고 하면 두 가지 종류가 있다.
1. 침 (금속 침) : 스테인리스 강철을 가공/연마/멸균한 침으로, 당연히 일회용으로 사용한다.
2. 약침 (약물 침) : 한약재에서 정제한 약리 활성 성분을 무균/멸균 공정을 거쳐 조제한 의약품으로, 주사제 형태(앰플)로 만들고 주사기로 환부에 자입한다. 당연히 일회용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환자도 완전하게 신뢰할 수 있고, 한의사도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는 침과 약침을 만들고자 했다. 세련된 디자인과 과학적인 조제 공정을 통해서. 명확하게 규명된 약리 활성 성분과 체계적인 가이드라인 교육을 통해서. 그리하여 브랜드 런칭 7개월 차, 이런 미션에 공감하는 전국 1,600개소 한의원과 함께 작지만 분명하게 계속 나아가고 있다. (최근에는 보건복지부 인증도 받았다!) 나는 시장 참여자의 '신뢰'를 확보하는 일만이,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2026년도에도 킵 고잉.
p.s. 혹시 궁금하신 환자분들은, 근처 한의원에서 '아큐렉스 약침 있나요?' 라고 물어보시길.
(아큐렉스 약침 홈페이지 : https://www.acurex.co.kr/)
혹시 지난 <연간 TMI 어워드 시리즈>를 읽어왔던 분들은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올해는 분량이 유독 짧다. 맞다. 변명하자면, 올해는 모든 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겼다. 경험의 한복판에서 주인공이기보단 관찰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순간순간의 기록에 목메기보다는 그냥 감각에 집중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여행도 일상처럼 편안할 때가 있었고 일상도 여행 같이 설렐 때도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그런 점에서) 2026년을 맞아 만다라트 계획표를 작성했는데, 한 가지 독특한 항목을 추가했다. 바로, '낭비'를 시도하는 일. 올해는 평소라면 굳이 하지 않을 낭비를 기꺼이 해보려 한다. 다시 만날 일 없는 아주 완벽한 타인에게 선물을 해본다거나(돈 낭비), 계획도 정처도 없이 그냥 무작정 떠나서 하루 종일 걸어본다거나 하는 일들(시간 낭비). AI를 활용한 효율화/최적화가 정답인 세상에 웬 삐딱한 발상이냐고? 음.. 그냥 재밌잖아. 개인적으로 나는 인생의 행복을 여기에서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들 각자만의 '의미 있는 낭비'로 채워가는 2026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해피 뉴이어!
(2025.01.01)
2021년은 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