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쯤부터 편의점에서 내 손을 지켜주던 장갑이 운명했다. 카스프레쉬 1.6L를 뜯어서 넣던 도중에 철에 걸려서 찢어졌다. 장갑이 아니었음 내 손가락이 찢어졌을테니 내 친구는 마지막까지 소임을 다하고 떠났다.
편의점에서 일하는데 장갑이 왜 필요한지 의문을 가질 수있다. 일하는 티를 내려는 유난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적어도 목적과 이유를 가지고 장갑을 고르고 사용한다. '내래 이 장갑을 선택한 목적과 이유가 있지비'
장갑의 제1 기능은 안전이다. 편의점 노동을 하다보면 의외로 다칠만한 구석이 많다. 사다리를 이용해서 일을 하다가 일어나는 낙상사고도 있지만, 박스를 뜯거나 음료를 뜯을 때 칼에 베이는 사고도 많다. 창고가 사람 키보다 높이있는 편의점일 경우 라면박스를 높은 곳에 보관하게 된다. 라면 1개 꺼낼려고 하면 사다리타고 올라가서 박스까지 꺼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서, 보통 칼로 박스에 라면크기 정도의 구멍을 뚫는다. 이 구멍을 뚫는 동안 방심하거나, 갑자기 손님이 들어오는 등의 상황이 발생하면 순간적으로 힘이 확 들어가서 손이 베일 수 있다. 새벽에 혼자 근무하다가 손가락 베인적이 있었다. 병원도 못가고 새벽에 혼자서 반창고 사서 끙끙 붙이고 있으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다.
장갑을 장착하게 되면 박스 뜯다가 칼에 베이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 특히나 박스를 많이 뜯는 가게라면 일반장갑보다 3M에서 나온 공업용장갑을 추천한다. 공업용이라 완전 두꺼워서 일반 커터칼로는 뚫기도 어렵다. 물론, 통풍도 엄청 안되서 한여름에 공업용장갑을 끼면 땀에 쩔어서 금새 썩은내가 나는 자신의 손과 만날 수 있다. 그래도 다쳐서 피보는 일보다는 낫다.
칼이 아니더라도 의외로 종이에 손가락을 베이는 경우도 많다. 행사 용지에 손이 베이기도 하고, 배송점착표에 손이 베이기도 한다. 플라스틱도 손가락을 위협하는 주범인데, 특히 컵커피 뚜껑에 있는 플라스틱이 충격에 잘 부서진다. 이 부서진 부분에 손을 다치는 경우가 있다. 이 모든 경우에 튼튼한 3M장갑하나만 있다면 이겨낼 수 있다.
장갑의 제2의 기능은 미끄럼방지다. 과자나 라면처럼 실온에 있는 상품들은 상관없지만, 아이스크림이나 맥주, 핫바따위처럼 냉장고나 냉동고에 보관되어있는 물건들은 표면이 굉장히 미끄럽다. 특히 한여름에 워크인(맥주나 음료수가 들어있는 창고)은 외부와 기온차가 많이 나서 맥주, 소주병마다 이슬이 잔뜩 맺혀있다. 이 상태에서 물건을 채우거나, 손님이 가지고 온 병들을 봉지에 넣으면 미끄러져서 물건을 떨어뜨릴 수 있다.
맥주의 경우 떨어뜨리면 맥주병이 찌그러져서 반품과 교환의 대상이 되서 점장에게 욕을 먹게되고, 소주병은 떨어뜨리면 와르르 깨져서 그 일대 바닥은 초토화된다. 최악은 병맥주인데, 소주는 그나마 알코올이라 깨져도 내용물은 금방 휘발하고 사라져서 흔적이 안남는다. 병맥주는 병이라 잘깨지기도 하고, 맥주인지라 깨지면 바닥이 온통 찐득찐득해진다. 걸레질을 아무리해도 그 찐득함과 냄새는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한겨울에 덜덜 떨면서 문을 열어 환기를 하는 방법 뿐인데,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장갑의 주기능이라기보다는 부가기능에 가까운 부분이다. 일단, 더러운 존재들로부터 보호가 가능하다. 편의점 바닥은 매일 쓸고 닦지만 돈통, 매대는 매일 쓸고 닦지 않는다. 물건들도 먼지가득한 창고에 처박혀있다. 그 자체로 더럽다. 진짜 안팔리는 물건들은 매대에 전시가 되어있어도 손으로 훑으면 먼지가 나올 정도라 물건 자체를 청소하기도 한다. 특히 돈은 가장 위험하고 더럽다. 도대체 뭐하다 왔는지 모를 사람의 지갑에서 나온 돈은 집어서 다시 더러운 돈통에 넣었다가 빼는 작업을 하루에 수백번씩 한다. 그 동안 내 손에 그 사람의 침이든 세균이든 뭐든 묻게 된다. 장갑은 이 세균들로부터 어설픈 방어막이 되어준다. 실제로 얼마나 막아주는 지는 모르지만, 맨살에 닿지 않으니 든든하다.
다음은 기능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하다. 어쨌든 천을 손에 하나 뒤집어쓰는 일이니 맨 손보다 따뜻하다. 이전에 일하던 편의점이 겨울에 히터가 안되서 덜덜 떨면서 일했다. 계산하는데 정말 손이 떨렸다. 그럴때 얇은 장갑이라도 하나 끼면 정말 따뜻하다. 특히, 겨울에 안 그래도 추운날 차가운 워크인 안에 들어갈 때 정말 유용하다. 피부가 건조해서 맥주 포장을 뜯다가 조금만 긁혀도 피부에 상처가 나는데, 이 때 장갑을 끼고 있으면 손을 지킬 수 있다. 차가운 음료를 계속 옮기다보면 손이 동상증세처럼 아프다. 이 때도 장갑을 끼면 그나마 따뜻하게 손을 지킬 수 있다. 한 여름에도 워크인 안에서는 적용된다. 다만, 폭염일때 워크인이 아닌 공간에서 장갑을 끼고 있으면 장갑안에 땀이 차오르니 유의해서 사용해야한다.
마지막으로 장갑을 사용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보통 편의점에는 코카콜라에서 점포마다 가져다주는 회색 장갑이 비치되어있다. 이 장갑은 가볍고 신축성이 좋아서 안낀듯한 착용감을 자랑한다. 그 만큼 얇기도 해서 칼이나 날카로운 부분에 노출되면 그대로 살까지 뚫고 들어오니 그 장갑을 사용할 경우에는 더 조심하자.
더 좋은 능률을 위해 다이소에서 장갑을 따로 구매했다면, 장갑을 길들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 장갑을 끼면 장갑이 뻣뻣해서 돈을 세는 등의 섬세한 손가락 움직임을 하기가 어렵다. 꾸준히 손가락을 움직여서 장갑을 손에 맞게 길들이자. 손이 너무 작아서 장갑을 길들이기가 힘들다면 3M공업장갑보다는 신축성이 강화된 장갑을 구입하는 편이 좋다.
3M장갑 광고처럼 쓰여진 이 글은 놀랍게도 오늘 임무를 다하고 삶을 등진 내 장갑에게 바치는 헌사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수 많은 위기 속에서 날 지켜준 장갑에게 감사를 표한다. 다이소에서 산 2천원짜리였지만, 몇만원짜리 장갑보다도 앞서 소개한 역할을 잘 해냈다. 나에게 잘 어울리는 친구였다.
나는 또 새로운 장갑과 일을 하게 되겠지만, 니가 그리울꺼야 장갑아. 다음생에는 카스프레쉬1.6L가 없는 세상에 태어나렴.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