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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원 Apr 11. 2023

나무를 심은 사람

후대를 위하여

      

이른 봄에 피었다 지는 꽃이 있고 여름에야 피는 꽃도 있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꽃나무들이 기지개를 켜며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린다. 매화, 개나리, 진달래 순이다. 봄이 완연히 왔음을 알리는 꽃은 목련, 벚꽃 등이 아닌가 한다. 벚꽃은 홀로 피어있어도 아름답지만 도심의 특정 지역에 가로수로 무리 지어 심긴 벚꽃 길은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매화, 개나리가 피는 3월 초엔 벚나무의 겨울눈은 아직 무겁게 감겨있다. 3월 말 즈음이 되면 벚꽃의 꽃망울은 팝콘 터지듯 일제히 폭발한다. 부풀어 오른 꽃망울들이 동시에 꽃을 피우며 남에서 북으로 행렬이 이어진다. 꽃이 피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연분홍 꽃이 터져 나갈 듯 나무 가득할 때면 사람들은 벚나무 주위로 모여든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벚꽃의 마법에 홀린다. 나비와 벌이 되어 꽃을 찾는다. 꽃향기를 맡으며 흩날리는 벚꽃 길을 거닌다. 

 

살랑이는 봄바람에 하늘로 피어오르는 꽃잎들... 그 꽃잎들이 가닿을 곳을 쫓다 보면 꽃잎은 어느새 내 발밑이다. 고운 꽃잎 밟을 수 없어 징검다리 건너듯 겅중겅중 건너뛰어본다. 어른도 아이도 비틀비틀 중심을 잡지 못하면서 까르르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른도 아이와 함께 동심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무리 지어 피어있는 벚꽃들은 가족을 모으고 연인들의 발걸음을 이끈다. 좋은 것을 함께 하고픈 사랑의 힘이다. 도로 양쪽으로 만개한 벚꽃 터널에서 머리를 들고 하늘 가득한 꽃잎을 바라본다. 사람들의 얼굴에 연분홍빛이 물든다. 연분홍 사랑이 스며든다. 말랑해진 마음은 그러데이션 벚꽃 잎 위에 연서라도 쓰고프다. 시라도 한 구절 짓고 싶다. 아름다운 꽃이 선물하는 감성이다.      


짧은 시간 화려함으로 주목받았던 벚꽃의 삶은 바람과 비에 일시에 떨어져 내린다. 한때 눈부셨던 벚꽃잎들은 낱낱이 흩어져 이리 저리로 바람결에 뒹군다. 사람들이 사라진 벚꽃길은 퇴색해 가는 봄이다. 벚꽃은 사라져도 벚꽃과 함께 한 황홀했던 기억은 남는다. 벚꽃은 뒤이어 피는 초록 잎을 가진 꽃들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아쉬움은 남지만 가야 할 때를 아는 지혜로움이다.     


어느 가을. 청산도에서 만난 단풍 터널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봄의 노란 유채와, 봄동배추꽃, 청보리, 연분홍 벚꽃이 사라진 섬에 붉고 노란 단풍꽃이 피어있었다. 단풍길이 끊어진 곳에서 잠깐 달리니 벚나무 터널이었다. 가을의 벚나무는 푸른 잎들로 무성했지만 벚꽃이 만개한 봄의 모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이 아름다운 길에 대해 들은 바가 없어 친구에게 물었다. 친구의 아버님 두 분이 단풍과 벚나무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고향을 떠난 분은 계획과 지원을 고향에 남은 분은 묘목을 하나하나 심으셨다고 한다. 두 분의 의기투합이 자녀들과 후배들, 섬 주민들에게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했다. 이후 섬은 대한민국에서 단풍이 가장 늦게까지 머무는 곳이 되었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에 나온 엘지아 부피에가 생각이 났다. 혼자서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 물이 콸콸 샘솟고, 거친 바람을 부드러운 미풍으로 만들고, 사람들이 모이게 한 사람. 30년 동안 묵묵하게 그 일대를 풍요의 땅으로 만든 사람. 벚나무를 심었던 친구 아버님도 그 나무들이 자라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을 상상하며 나무를 심었을 것이다. 모두의 유익을 위해 묵묵히 실현하는 힘. 깊은 사랑이다.  

   

섬의 벚꽃 터널은 뜨거운 햇살 아래 그늘을 만들어 여행객이 잠시 쉴 수 있는 자리가 된다. 늘 내려다보는 푸른 바다로부터 시선을 돌려 샤방한 꽃잎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게 한다. 농사와 어장에 피로한 몸도 꽃그늘을 걷다 보면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타임 슬립으로 열세 살 나는 친구들과 섬의 벚꽃길 위에 있다. 하늘하늘 춤추는 벚꽃을 보며 친구들과 수다 삼매경인. 해가 쨍한 날 꽃그늘 아래 금을 그어 오징어 게임을 하는. 바닷바람에 송이송이 꽃눈이 내리는 날 육지로 떠난 이들을 그리워하고 있는. 여러 모습의 내가 있다.  

    

나무를 심고 더 시간이 흐른 뒤 섬이 슬로시티로 지정되었을 때 이 길은 꼭 걸어야 할 길로 추천되었다. 그 길을 오가는 많은 사람이 벚나무와 함께 청산 바다의 절경을 감상한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그 길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는 모든 이에게 언제나 살아있는 것이다. 연분홍 벚꽃 잎 위에 감사의 편지라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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