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간 것은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뀔 무렵이었다. 첫 학교에 가기 전부터 마지막 학교의 고학년일 무렵까지 나를 떠나지 않은 것 중 하나가 컴퓨터 게임이었다. 대외 활동과 진로 등 여러 문제들로 게임을 거의 내려놓았지만 여전히 '겜돌이'였던 시절을 상기하게 되는 순간들이 자주 있다. 최근에는 대표적으로 <레디 플레이어 원>(2018)과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 같은 영화가 그랬다. 두 영화에 대해서는 각각 링크한 바와 같이 장문의 글을 쓰기도 했으니 궁금한 누군가는 읽어보시기.
넷플릭스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2016~)의 첫 시즌 초반부에는 주인공인 윌, 마이클, 더스틴, 루카스가 집 지하실에서 함께 <던전 앤 드래곤>을 플레이하는 대목이 있다. '테이블탑 롤플레잉 게임'으로 호명되는 <던전 앤 드래곤>은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규칙 가이드가 있고 같은 게임을 몇 년씩 계속할 수 있을 만큼 그 판타지 세계관이 방대하다. 지금 기준으로 생각하면 그냥 흔한(흔하지만 좀 복잡한) 보드게임처럼 생각될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 플레이어에게 상상력을 부여하고 그로부터 나오는 여러 선택과 결정에 의해 세계 속 플레이어의 역할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 같은 오늘날의 MMORPG 세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기념비의 하나다. 지금 [기묘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게임에 관한 넷플릭스 시리즈 작품 하나를 소개하려는 것이다. 2020년 8월 공개된 [하이 스코어] 이야기다.
제목에서 쉽게 연상할 수 있는 것처럼 [하이 스코어]는 게임 개발자들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즐기는 여러 게임들의 원류를 찾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다. 오락실 게임부터 가정용 콘솔 게임 등에 이르기까지 그 범주가 비교적 방대해서, 여기서는 세 번째 에피소드 '롤플레잉 게임의 탄생'(Role Players)을 중심으로 소개하도록 한다.
'콜로설 케이브 어드벤처', '미스터리 하우스', '울티마' 같은 이름들을 들어보셨는지. 지금과 같이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 기반의 컴퓨터 게임들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 컴퓨터는 문서 작업이나 스프레드시트 등을 담당하는 기계였지 게임을 위한 디바이스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몇몇 프로그래머들은 '텍스트 인터랙티브'라고 말할 수 있는 텍스트 형태의 게임을 구현했다.
커서가 깜빡이며 이런 메시지를 출력한다. '난쟁이가 당신에게 접근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선택은? 그 선택의 기준과 선택의 결과는 컴퓨터 앞에 앉은 당신의 상상에 달렸다. 원하는 답을 입력한다. '도망간다.', '나무에 숨는다.' 등등. 그러면 커서는 이어서 다음 메시지를 출력한다. 사용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당신'은 죽는다. 게임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거나, 특정한 방법을 통해 부활할 수 있다. 그래픽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채 이는 오로지 문자 언어로만 특정한 명령어 체계를 통해 구현된 일종의 놀이인 것이다. 이게 '콜로설 케이브 어드벤처'(Colossal Cave Adventure, 1975) 이야기다.
'Mystery House'(1980), 영문 위키피디아 출처
로버타 & 켄 윌리엄스는 500만 대가 넘게 팔리며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연 '애플 II'를 기반으로 그래픽을 쓴 최초의 컴퓨터 게임인 '미스터리 하우스'(Mystery House, 1980)를 선보인다. 저장장치 용량이 한정적이었던 당시로서는 실질적으로 이미지를 구현했다기보다 점/선/면을 겨우 그려낸 형태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문자 언어를 벗어난 더 넓은 표현 방식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Final Fantasy'(1987), 영문 위키피디아 출처
리처드 게리엇에 의해 개발된 롤플레잉 게임 시리즈 '울티마'(Ultima, 1981~) 등 점차 기술이 발전하면서 컴퓨터 게임이 표현할 수 있는 세계는 더 세부적이고 더 방대해졌다. 일본 스퀘어社에서 개발된 '파이널 판타지'(Final Fantasy, 1987~)에서는 이제 프로그래머가 아닌 전문 일러스트 작가에 의해 더 구체적이고 더 넓은 상상력이 발휘된 캐릭터와 세계관이 만들어졌다. 물론 당시 그래픽으로 구현할 수 있는 이미지에는 한계가 있어 위 그림과 같이 지금 시각에서는 투박하고 작고 간단한 형태였지만 지금은 모두가 알다시피 상상하는 것 그대로를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울티마' 시리즈를 개발한 리처드 게리엇. '하이 스코어' 3화 중에서
이 이야기를 지금 컴퓨터 게임 기술 발전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하는 게 아니다. [하이 스코어] 3화 '롤플레잉 게임의 탄생'이 다루는 건 기술이 아니라 결국 '왜' 그러한 게임들이 만들어졌는가에 있다. "진짜 그 세상에 있는 것처럼 실감 나는 게임을, 모험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려고 했다"라는 로버트 윌리엄스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플레이어에게 선택권을 주고 그 선택에 따라 복잡한 세계로의 모험을 떠나게 되는 '롤플레잉' 게임 자체의 근본적인 의미를 탐구한다.
예를 들어 [하이 스코어] 3화에는 LGBTQ를 중점적으로 다룬 최초의 롤플레잉 게임인 '게이블레이드'(GayBlade, 1992)가 언급되는데, 1980년대 말부터 동성애를 향한 혐오가 사회적으로 컸을 당시, 그 게임은 '돈가방을 든 목사', '극성 보수파' 등을 몬스터로 등장시켜 그들을 없애는 스토리를 다뤘고 당시 대표적인 동성애 혐오자였던 미국의 언론인이자 정치인 팻 뷰캐넌(Pat Buchanan)이 '최종 보스'였다. 게임을 플레이 한 사람들은 개발자인 라이언 베스트(Ryan Best)에게 수많은 감사편지를 보냈다. 그 게임을 하는 동안 웃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고.
'GayBlade'(1992), The CRPG Addict 출처
이 시기에 이르면 롤플레잉 게임은 단지 '시간을 때우는' 킬링타임 콘텐츠가 아니라 플레이어 자신과 그의 '아바타'가 서로 동일시되어 게임 내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중요해지는 영역에 이른다. 일례로 리처드 게리엇은 '울티마 4'(1985)를 개발할 무렵부터 "사악한 사람은 결국 승리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주려고 했다"라고 밝힌다. 이것이 어떻게 구현되냐면 특정 보스를 제압하기 위해서 필요한 어떤 아이템이 있는데 그게 게임 내에서 플레이어의 행실에 따라 무언가를 훔치거나 무차별적 살인을 한다든가 하면 해당 아이템을 구입할 수 없도록 만드는 식이었다. 단지 재미만을 추구하는 일이 아니라 '롤플레잉 게임'의 역할은 결국 플레이어에게 영향을 주는 쪽으로 발전했다.
[하이 스코어]에는 그래서 흥미로운 에피소드 하나가 더 언급된다. 앞서 소개한 '게이블레이드' 개발자는 이사를 하던 중 배송업체의 실수로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게임 원본 소스를 잃어버리게 되는데, 시간이 지난 뒤 LGBTQ 비디오 게임의 아카이브를 만드는 한 활동가의 도움을 받아 온라인 공간에서 소스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여러 웹사이트와 소셜미디어에서 사람들은 개발자 이름을 따 '라이언 게임 찾기'라는 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Role Playing Games' Positive Role in Society"
[하이 스코어]는 산업으로서의 게임 콘텐츠에 관심이 있거나 아니면 스스로 게임에 열렬하게 몰입해본 적 있는 이들에게 여러 가지 향수와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는 시리즈다. 아무리 게임이라고 해도 다큐멘터리는 결국 재미있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을 이들을 배려한 것인지 [하이 스코어]는 그 편집과 구성에 있어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가령 3화 '롤플레잉 게임의 탄생'을 예로 들면 개발자의 인터뷰를 인터뷰만으로 구성하지 않고 향수를 자극하는 도트 그래픽 기반의 판타지 세계 속 장면처럼 보여준다든지 '던전 앤 드래곤'을 플레이하는 리처드 게리엇의 모습을 여러 코스튬을 입은 그의 모습들로 구분한다든지 하는 식. 뒤에 가면 앞서 언급한 '콜로설 케이브 어드벤처'의 형식을 빌어 DOS 화면의 명령어 입력 화면처럼 자막을 배치하기도 한다. 이렇게 말할까. 이건 다큐멘터리계의 <레디 플레이어 원> 같은 귀한 시리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하이 스코어]는 총 여섯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다. 회당 40분 안팎으로 여섯 회를 연이어 감상해도 총 252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