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나 의도와 무관하게 멀어지는 줄도 모른 채 멀어져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가오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다가오는 사람도 있다. 어떤 것들이 이미 지나가고 난 뒤에도 그것이 정말 지나간 게 맞나 하고 한 번 더 확인하고 돌아보는 게 내 습성이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무언가를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고 또 시간만으로는 되지 않을 때도 있다. 앞으로도 여전히 무딘 사람이겠지만 그래도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 후회하지 않을 말과 행동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순간이 조금 더 있기를 바라본다. 내년에도 이 세계에는 모르는 것들이 가득하겠지. 지키고 싶다고 생각한 가치가 깨어지고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던 일이 곁에 성큼 다가와 있는 일이 일상에는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좋아하는 시인의 말처럼 인생은 원래 이상하고 좋아하는 소설가의 말처럼 우주는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 오래 생각하고 그것에 관해 기록하기, 라는 삶의 방식과 좋아하는 것들을 진정으로 더 잘 좋아하기, 라는 일상의 태도로서 삶에 다가오는 것들을 조금 더 잘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20.12.30.)
마스크 안 쓴 사진을 찾다가, 2019년 1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2.
(이미 공지했던 바와 같이, 이메일 영화리뷰&에세이 연재 [1인분 영화]는 한동안 쉬어갑니다.)
당분간은 월수금 마감이 없다는 사실에 낯설어하며 대신 마감할 것을 찾느라 분주한 일상을 보낼 것 같다. 여러 차례 이야기해왔지만, 일상 전체를 글쓰기로 칭할 수 있다면 그 글쓰기 중 [1인분 영화]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시간, 그 영화를 다시 보는 시간, 영화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과 쓸 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 쓰고 나서 다시 읽어보는 시간까지. 야근을 한 날에도 썼고 회식을 하거나 지인을 만나고 들어온 날에도 썼다. 밤 열한 시가 훌쩍 넘어서 퇴근을 하게 되었다든가 몸이 아팠다든가 하지 않는 한 그날 자정을 넘기지 않았다.
⠀
극장에서 새 영화를 보는 일이 평년보다 다소 적었다. 물론 코로나 19 영향은 아니었는데, 놓치고 싶지 않은 신작들이 많았지만 봤던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꺼내고 그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고 돌아보는 일이 내게는 더 중요했기 때문인데, 하반기에 들어서 이메일로 쓰는 글의 영화 한 편당 분량을 길게 한 것도 좀 더 그 영화에 대해 오래 생각하고 싶어서였다. 책은 여전히 많이 샀지만 당장 쓰는 글에 필요한 책이나 영화 원작이 아니면 일부를 제외하면 잘 손이 가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다.
⠀
내 글이 그동안 어떻게 읽혔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보낸메일함과 에버노트에 가득하게 쌓인 것들을 다시 들추었을 때 부끄러운 글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올해의 티켓들을 모아놓고 만지작거리니 월마다 주목했던 작품이나 거듭 극장으로 다시 향하게 했던 몇몇 작품들이 아직 생생하다. 이제 아직 읽지 못한 책들과 앞으로의 영화들을 위해 걸어가야겠다. "기록은 쓰는 이의 마음부터 어루만진다"라는 문장을 다시 생각한다. (안정희, 『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 (2020.12.31.)
올해 CGV에서 만든 포토티켓/포토플레이들을 꺼내봤다.
3.
<미안해요, 리키>(켄 로치, 2019)로 시작해 <원더 우먼 1984>(패티 젠킨스, 2020)로 마무리 한, 2020년의 극장 영화 기록. 영화가 영화 안과 영화 밖을, 비일상과 일상을, 비현실과 현실을 이런 식으로만 이어줄 수 있다면 나는 그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볼 수 있다. 이미 알고 있는 그 세계를, 처음 만나러 가는 것처럼.
CGV에서 주는 영화 '원더 우먼 1984'의 필름마크와 아이맥스 렌티큘러 카드, 그리고 포토플레이 두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