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비추는 서로
도시가 지겨울 때가 있다. 지금처럼 땅이 열을 받아 지글거리고 창밖으로 자동차 지나는 소음이 밤늦도록 계속될 때. 길을 걷다 보면 이름도 낯선 붉은등우단털파리의 습격으로 수시로 몸서리치게 될 때. 이 모두가 환경오염과 기후 위기와 맞닿아 있고 도시의 삶이 그걸 부채질하고 있어서. 사람들 사이 조밀한 간격과 그처럼 과도한 관심, 속도와 소비가 시너지를 내며 서로를 부추기는 생활. 그 모두가 지긋지긋해지면, 하루빨리 도시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산을 등지고 멀리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의 삶을 상상한다. 그런 순간이 부쩍 늘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게 도시를 벗어나는 게 가능할까. 어릴 적 살던 동네에는 543번 버스의 종점이 있었고 그 버스를 타고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시험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어린이 대공원까지였다, 한양대학교까지였다, 종로까지 나아가면서. 나의 키가 자라는 만큼 내가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늘어났다. 한동안 종로는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멀고도 멋진 곳이었다. 커다란 서점이 세 개나 있고 곳곳에 영화관이 있었으니까. 대학로에 처음 갔던 날엔 세상에 이런 동네가 있다는 데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난다. 문을 나서면 공연장이 늘어선 골목으로 이어진다니, 나중에 크면 꼭 여기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던 우스운 순간도 내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다.
종로에서 광화문, 대학로에서 종로, 을지로, 충무로로 이어지는 길을 두 다리로 걸어 몸에 새기며 어른이 되었다. 서점과 극장, 공연장 사이를 발자국으로 연결하며 도시 한 복판의 지도를 그렸다. “뉴욕에서 나고 자란 이의 삶이라는 건 구조물이 아니라 이 목소리들-그 어떤 목소리도 다른 목소리를 밀어내지 않고 층층이 쌓인 무수한 목소리-을 다루는 고고학과도 같다.”*고한 비비언 고닉은 말처럼, 내 안에도 도시를 걸었던 발자국이 층층이 쌓였을 것이다. 그 사이로 스쳤던 풍경과 사람들의 목소리가 지층 사이를 메우는 흙처럼 스며들었을까. 내 안에 축적된 도시의 흔적이 고고학과 견줄만하다는 비비언 고닉의 문장에 도시의 삶을 다시금 긍정하게 된다.
도시에서 누리는 삶의 열기와 역동성도 거부할 수 없다. 거리를 메운 사람과 자동차, 그 모든 것들의 움직임으로 세상이 살아있다는 강렬함을 감각하고 그 거대한 움직임의 일부라는 사실이 새롭게 가슴을 두드릴 때 우리는 삶으로 다시금 발을 내딛을 힘을 얻기도 한다. 내겐 세상에서 사라지는 법을 연습했던 영화관과 고독 안에서 평온해지는 법을 배운 미술관도 중요하다. 가슴속에 일순간 날아오르는 새 떼를 품고 산다는 걸 깨우쳤던 무수한 공연장도. 도시의 문화를 흡수하고 타인들과 취향을 공유하면서 나의 취향이라는 것도 키울 수 있었다.
여전히 틈만 나면 길을 걷고 걷는 즐거움을 최고로 치는 내게 아직은 도시가 필요하다. 여성으로 안전하게 활보할 수 있는 공간 또한 도시가 보장하니까. 뚜벅이 생활자인 내겐 편리한 대중교통도 필수고. 수시로 도시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뼛속까지 도시인이라는 사실을, 이 애증에는 깊은 사랑이 뒤엉켜 있음을 비밀스레 끌어안는다.
비 오는 날 도시를 걷는 일은 또 다른 즐거움을 건넨다. 가늘게 내리는 빗방울이 세상의 모든 표면에 닿아 울리는 소리는 신경을 달래주는 음악처럼 들린다. 빗줄기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습기를 머금어 윤곽이 부드러워지지지만 색만은 더욱 짙어진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촉촉한 기운은 아가미로 숨을 쉬는 기분을 상상하게 하고. 그런 순간엔 주머니 속에 심해어 한 마리를 숨긴 사람처럼 걸음은 느려지고 숨소리도 고요해진다.
안국역에서 내려 국립현대미술관을 향해 걸었던 날이다. 오래된 학교 근처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지붕처럼 하늘을 가리고 문지기처럼 당당하게 섰다. 가게들이 늘어서 인파가 북적거리는 곳을 피해 감고당길로 빠져나갔다. 그 샛길을 유난히 좋아한다. 낮은 집을 지나 돌담이 길게 이어지고 바닥에는 적갈색 벽돌이 모자이크처럼 박힌 길. 아담하고 고즈넉한 길에는 대체로 인적이 없다. 드물게 오가는 몇몇을 마주하는데 그러면 하고많은 길 중 그 길을 택했다는 것만으로 상대에게 호감이 섞인 궁금증이 생긴다. 이번에는 맞은편 길 끝에서 두 사람이 우산을 쓰고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각자가 들고 있는 우산의 크기만큼 두 사람은 떨어져 있지만 가느다란 몸만은 서로를 들으려 미세하게 기울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길에서 뺄 수 없는 풍경의 일부가 된다.
길을 걸을 때면 시선은 밖을 향한다. 끊임없이 외부를 탐색하며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모습과 타인의 움직임에 주목하는 사이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리는 기분에 젖는다. 때로는 흩어져 세상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혼자이더라도 외롭지 않다. 늘 무언가와 나란히 걷는다는 감각 때문이다. 내 안에는 나와 같은 몸을 쓰며 나와 동행해 주는 내가 있고 외부에는 도시를 함께 누비는 타인이 있으니. 혼자이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다. 길 위에서는 모든 것이 나를, 우리를 지켜본다.
미술관에 도착해 전시실로 들어서니 주말이라 사람이 많았다. 작품을 감상하며 조용히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둘러 싸인 동안에는 관람객 모두를 나의 잠재적인 친구라고 여긴다. 수많은 장소 중 이 미술관의 이 전시를 택했다는 데에서 동질감을 느꼈다. 간격을 두고 선 곁의 낯선 이와 비슷한 지점을 바라보며 동시에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미술관을 찾는 마음은 고요와 고독을 기대하지만 절대적으로 혼자이길 바라는 건 아니다. 기꺼이 타인의 시선 속으로 걸어 들어가 타자가 되고 배경이 되고 싶다는 모순적인 마음도 있다. 그 일은 뜻밖에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해서. 자아란 타자의 존재로 성립할 수 있다던데 군중을 찾아 나아가는 일은 자신을 발견하겠다는 시도일 것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겐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중성적인 타인의 시선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지만 서로를 모른다는 이유로 가장 조심하게 되는 관계이기에. 낯선 타인들과 공공의 장소를 공유하며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예의와 품위를 갖춘다. 일상에서 허물어지기 쉬운 자아에게 사회적인 옷을 입혀준다. 모르는 타인에게조차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랄까. 미세한 긴장으로 인간이라는 존엄을 챙겨 평소 돌보지 않던 자신의 뒷모습까지 더듬어 본다. 불특정 다수와의 만남으로 나라는 삶의 외연을 조금 더 또렷하게 감각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마주침은 내 삶의 윤곽을 그리는데 꼭 필요하다.
전시를 보고 경복궁 앞에서 마을버스를 탔다. 비가 내려 차가 막히는지 몇몇 사람들이 기다리다 지쳐 발길을 돌린 후에야 버스가 도착했다. 길게 늘어섰던 사람들이 버스에 오르자 좁은 버스는 금세 만원이 되었고. 관광지라 승객들 일부에는 외국인들이 섞였다. 한 팀의 관광객이 운전기사와 서툰 영어를 주고받으며 현금으로 요금을 내는데 단말기에 카드를 찍는 대신 현금을 지불하는 모습이 생소하게 다가왔다. 뒤이어 또 다른 외국인이 올라탔다. 자신의 (교통 카드 기능이 탑재되지 않은) 신용 카드로는 버스 요금을 지불할 수 없다는 걸 알고 꽤나 당황하는 눈치였고. 현금을 미리 준비하지 않아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 카드로 요금을 낼게요. 한 명 더 찍어 주세요.”
조금 전 버스를 기다리는 사이 줄 뒤편에서 그 외국인과 스페인어로 드문드문 대화를 나누던 사람이 나섰다. 우연히 줄의 앞뒤에 서면서 만난 두 사람은 스페인어라는 작은 창을 열어 서툴게 소통을 하는 눈치였는데. 그가 외국인에게도 자신이 요금을 내주겠다고 전하자 외국인 여성은 놀라면서도 고맙다고 인사했다.
버스를 기다리느라 지치고 뒤이어 만원 버스의 불편함과 비 오는 날의 불쾌함이 가중되어 묘한 긴장감이 떠오르던 찰나였다. 그때 한 사람의 호의로 버스 안의 분위기는 불안에서 가벼운 유쾌함으로 급속히 전환되었다. 한 사람을 향했던 호의가 일순간 버스에 탄 모두에게 닿는 호의로 바뀌었다. 기다림은 줄고 예측불가의 혼란은 말끔히 지워졌다. 서로를 몰라도 기꺼이 작은 선의를 베풀 수 있다는 기쁜 사실이 밀폐된 버스 안으로 신선한 바람처럼 스쳤다.
버스가 광화문 광장으로 들어설 즈음 외국인 여성이 영어로 물었다. ‘서울역’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곁에 있던 또 다른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말로 답했다. “이 버스가 서울역에 가요. 방송으로 알려줄 거예요.” 그 말에 외국인 여성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우연히 만나도 서로를 걱정해 주고 언어가 달라고 소통을 시도하는 사람들로 버스 안에 친밀함과 정다움이 흘렀다. 좁고 흔들리는 마을버스 안에서 무심함을 깨고 서로를 듣고 답하는 사람들의 호의로 뭉클했다. 이건 뭘까? 움직이는 작은 공간에 가만히 서서 낯선 이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어떤 특별한 공기가 내게 와닿는 느낌은? 때로 사람들이 다정하게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 같아 다행감에 젖어드는 것은. 서로를 비추는 서로가 있어 품위 있는 인간으로 남을 수 있겠다고.
나는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도시를 있는 그대로 느낀다. 내가 지금까지 몸으로 살아낸 것은 온갖 갈등이지 환상이 아니었으며, 뉴욕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하나다.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박경선 옮김, 글항아리, 215쪽
도시를 걷는 일을 사랑한다. 날마다 반나절 동안 뉴욕을 9km씩 걸으며 거리에서 펼쳐지는 ‘고립을 가로질러 서로를 발견하는 인간들의 드라마’를 듣고 보며 자신에 대한 더 깊은 이해에 도달했다는 비비언 고닉처럼. 계속 사람들이 도시를 빠져나간다는 이야기가 들리지만 도시가 살아 있는 한 “이곳을 기쁨으로 가득 채우려면 우리 모두가 필요”*하다는 그의 문장을 기억하고 싶다.
기동력이 떨어져 기필코 운전을 해야겠다고 해마다 다짐하고 나이가 들수록 작은 정원이 있는 시골집을 꿈꾸는 일이 잦지만, 좋아하는 길을 걸을 때면 아직은 도시구나 생각한다. 나를 키웠고 여전히 나를 감동시키는 무수한 것들이 살아 숨 쉬는 공간. 광화문 대로에서 내게 닥치는 광대함을, 좁은 돌길을 걸을 때의 다정함을 아직 더 누리고 싶다고.
두 다리로 걸어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서든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공간, 외로울지언정 고립되지 않을 수 있는 도시 서울. 그 거리에서 발걸음 끝에 새의 날갯짓이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진솔한 뒷모습으로 수시로 서로를 위로하는 사람들을 엿본다. 도시의 주름진 얼굴을 응시하다 울컥해지는 때가 있다. 걸어보지 못한 길이 너무나 많다.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박경선 옮김, 글항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