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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Jul 10. 2024

이름

너의 이름은



우리는 우리의 삶을 채워나가기 위해 이런 바보 같고 사소한 것들을 필요로 한다. 설령 그것들이 별 의미 없는 것들일지라도 말이다. 애초에 걸린 판돈이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기만 한다면. 삶이 늘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는 일들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때로 삶은 그냥 삶이다-그리고 그래도 괜찮다.
46쪽, ‘마루 모리(Maru mori)-평범한 것들의 가슴 아픈 소박함’ <슬픔에 이름 붙이기>, 존 케닉 지음, 황유원 옮김, 윌북




딸아이와 도서관을 다녀왔다. 가방 가득 책을 담아 매고. 비가 오니까 장화를 신고 우산을 들고. 딸아이는 우비까지 걸쳤다. 도서관 가는 길 가파른 언덕을 오가는 모노레일은 저녁 6시까지만 다니는데 해가 길어지면서 운행시간이 연장되었을까. 오갈때 모두 모노레일을 타는 행운을 누렸다. (장)원영이 즐겨 쓴다는 그 말도 따라해보고.



"완전 럭키비키!"



도서관 옆 작은 공원에서 미미(고양이)도 만났다. 딸아이가 생각났다는 듯 ‘보리’라고 이름을 붙였다. 옅은 황토색에 하얀 줄무늬가 있는 고양이인데 넉살이 좋아 동네 아이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는다. 누렇게 익은 보리가 떠올라 미미와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구나 싶었다.




고양이가 한갓지게 엎드려있던 벤치 옆엔 배롱나무가 한 그루 섰다. 지난여름 배롱나무에 꽃이 한창이던 때 꽃처럼 진한 분홍색 우산을 쓴 사람이 나무 아래를 걸어갔던 장면을 오래 기억했다. 여름 동안 분홍빛 배롱꽃이 보고 싶어 열심히 도서관을 드나들었고. 그랬는데, 한 해 지나 그 꽃이 다시 피기 시작했다.



"여름이구나!"



사람들이 다니는 길쪽 가지 끝에서부터 꽃이 열렸다. 사람들 발소리, 말소리 듣고 싶어 거기서부터 피어나는 걸까. 식물도 말을 듣는다던데 시선도 느끼는 걸까. 누군가 바라보며 기다리는 걸 알아 그 방향으로 먼저 얼굴을 내미는 걸까.




언젠가 여름에 피는 진분홍 꽃의 이름이 궁금해 찾아보다 ‘배롱나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 이름을 알게 되자 그 나무가 특별해졌다. 모두가 다니는 길에 있지만 나만의 나무같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길 기다리면서 더 각별해졌다. 어떤 장면들을 비밀스레 품으면서는 기억을 공유한 친구같은 기분도 들었고.



모르던 식물의 이름을 알게 되고,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고. 그런 게 삶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무언가를 새롭게 알아가고, 알게 된 대상과의 만남을 기대하는 일. 마음이 기울다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다 닮아가기도 하는 일. 이곳 저곳에 마음을 심어두고 그 마음을 보고 싶을 때마나 만나러 가는 일.



때가 되면 헤어지고 때로는 잊히기도 하지만 어느 결엔 다시 만나고 불현듯 기억에서 생생히 살아나기도 하는. 배롱나무를 알게 된 것처럼 또 어떤 나무를 알아채고 궁금해하다 이름을 찾아내고 꽃이 피기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미미처럼 고양이가 될지도, 어느 모퉁이에 있는 창문이거나, 낮은 지붕, 돌담, 깨진 유리 조각일 수도. 꾸준히 무언가를 아주 조금씩 만나고 발견하고,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삶이면 좋겠다.




그렇다면 삶은, 지난한 반복으로 소모되고 지쳐가는 일이 아니라 되풀이되는 듯 보이는 매일을 거쳐 끊임없이 낯설고 새로운 순간에 닿는 일일 것이다. 무언가에게 내내 다가가는 일. 깊어지고 짙어지는 일.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배움과 기쁨을 쌓는 일일 것이다.




책을 다시 빌려 돌아가는 길. 우리 앞으로 가족인 듯 보이는 세 사람이 걸어갔다. 딸아이보다 한두 살 많아 보이는 아이가 보리를 보며 이렇게 불렀다.



"식빵아!"



나와 딸아이는 소리없이 두 눈을 마주하며 눈빛을 교환했다. 내겐 미미, 딸아이에겐 보리인 고양이, 누군가에겐 식빵이였구나. 너에겐 몇 개의 이름이 있는 걸까.   






PS. 어느날 도서관 가는 길엔 미미가 여러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걸 보았다. 그중 한 아이가 미미를 불렀다. 

"고등어!"


오늘 딸아이와 같이 도서관을 다녀오다 벤치 위에 앉아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미미이자 보리, 식빵이면서 고등어인 너를 보았다. 그 평온한 잠 옆에 나도 함께 눕고 싶었지만, 너의 또 다른 이름이 궁금해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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