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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후와 세기

by 찬우

네 이름을 부르면 먼 데서 불이 꺼진다. 너는 늘 현관 센서등이었고 나는 어둠의 눈이었지. 지붕 없는 저녁, 서늘한 팔꿈치를 지나 낡은 오월의 기침 같은 밤이 와. 입을 다문 창문들 사이로 내가 아닌 어떤 이름들이 흘러들었겠지. 그 여름엔, 불과 꽃이 하늘에서 피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축복이라 잘못 불렀고 누군가는 방향을 잃은 새떼로 봤다. 나는 단지 그 빛 아래 다른 그림자를 뭉근히 밟고 싶었을 뿐. 그날 입은 옷에선 새 침구의 향이 났고 그건 내가 한때 좋아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흔연한 공간감. 옆으로 걷는 걸음을 비슷하게 흉내 내며 조금 젖은 흙에 금방 지워지는 발자국을 찍고 있어. 말하지 못한 건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합의된 것들이었고 그 결정을 내린 건 나도, 너도 아닌 너와 나. 아주 오래 걸려 소화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어디선가, 둑에 금이 가는 소리. 모두가 기대에 가득 차 하늘을 올려다보는 동안 결말을 알고 있는 나는 그들의 뒤통수를 본다. 허용된 기다림보다 한참 후에야 완전히 방류된 소리와 옅은 화약 냄새. 무언가 지나쳤다는 건 분명했다. 잔열 위에 남은 파편 하나가 빛도 없이 튄다. 다 타지 않은 것들이 어둠 속에 오래 남아 있다. 파편이, 파편이 하나씩 지워진다. 확실히 잊는 쪽이 덜 아픈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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