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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프 워드

by 찬우

저번엔 너무 더웠는데

이번엔 좀 추웠다

지구가 아픈 여름은 그래


차곡차곡 쌓은 애정이 특히 쉽게 감기 걸리지

그래 아픈 사람에게는 사랑보다 인내가 더 필요하지


어이없지

내가 이런 말을 남긴다는 게


호의도 날름 얻어먹고 헤헤 웃기가 내 장기

이 뻔뻔함을 미덕으로 오독한 관계 때문에

귀갓길 어느 순간엔 그때 웃은 날 저주하지

내가 날 따돌리는 나날


[Web발신]


쉬는 날 비 와라. 별 관심도 없는 놈이 자꾸 인스타스토리에 좋아요 눌러라. 알람 맞췄는데 진동이어서 못 듣고 계속 자라. 나만 아는 맛집인데 드럽게 인기 없어서 문 닫아라. 오늘만 무단횡단했는데 하필 사복 경찰한테 걸려라. 톨앤빅앤핸썸앤영앤리치 남자가 번호 따러 왔는데 알고 보니 왕게임 벌칙이어라. 넷플릭스 계정 공유하다가 정지당해라. 구멍이란 구멍은 다 막았는데 자꾸 모기 나와라. 렌즈 돌아가라. 연말정산 잘못해서 가산세 부과돼라. 채널 돌리다가 심야괴담회 점프스케어 장면 마주쳐라. 네잎클로버인 줄 알았는데 세 잎이어라. 9회 말 1아웃 1점 차 리드, 잔루 만루 상대 팀 4번 타자 공격 상황 낭낭한 병살 코스 내야 땅볼 쳤는데 우리 유격수 어이없는 실책으로 동점 주자 홈인, 나머지 주자 올 세잎이어라. 냉장고 고장 나서 아이스크림 다 녹아라. 간만에 러닝 페이스 좋았는데 거리 측정 어플 GPS 고장 나라. 엄마랑 싸우고 방문 닫았는데 바람 세게 불어서 다시 불려 가서 혼나라. 미용실에서 사진 보여줬는데 "이건 고객님 두상이랑 안 어울리세요" 소리 들어라. 에어팟 한쪽 고장 나라. 맥주캔 따는데 거품 넘쳐서 추하게 입부터 갖다 대라. 오랜만에 잘 나온 사진 SNS 업로드했는데 좋아요 1개 받아라. 컨트롤 S 안 했는데 공들인 문서 파일 닫혀라. QR 결제하는데 화면 밝기 너무 어두워서 인식 안 돼라. 폰 카메라 켰는데 전면 카메라여서 아이고 깜짝 놀래라. 코스피 저점인 줄 알고 샀는데 아니어라. 핸드크림 안 열려서 이로 물어뜯는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봐라. 지하철 내리려고 문 앞에 섰는데 반대쪽에서 열려라. 쌍쌍바 반으로 안 쪼개져라. 백화점 시식코너에서 눈 마주쳐서 입맛만 다셔라. 오늘 고데기 뒤지게 잘 먹었는데 보여줄 사람 없어라. 옆자리 과장님 30분마다 연초 피우러 가는 헤비스모커여라. 쿠팡이츠 뚜벅이 걸려서 계속 배달 지연돼라. 운동하려고 옷 다 갈아입었는데 갑자기 귀찮아져서 다시 벗어라. 주차장 자리 겨우 찾았는데 경차 전용이어라. 자판기 음료 콜라 눌렀는데 솔의 눈 나와라. 손톱 깎다가 튕겨서 잃어버렸는데 쥐가 먹고 너랑 똑같은 사람으로 변신해서 대신 출근했는데 계속 찍찍거리기만 해서 사내 메신저에 이상한 사람으로 널리 소문나라. 명당에서 산 로또 번호 하나도 안 맞아라. 새 운동화 샀는데 걸을 때마다 삑삑 소리 나서 세간의 집중 받아라. 시험 보는데 옆자리 사람 자꾸 다리 떨어라. 약속 장소 도착했는데 친구들 다 늦는다고 해서 혼자 멍 때려라. 동네 길냥이한테 냥냥펀치 맞아라. 12층 사는데 한 달간 엘리베이터 점검해라. 소개팅 자리에서 스파게티 주문하는데 갑자기 게슈탈트 붕괴 현상 와서 스파시바라고 말하고 첫인상 망가져라. 그 상황이 머쓱해서 던진 그의 농담이 배려심보다 더 썰렁해라. 썩 괜찮은 조건의 그가 젓가락질 못 해서 결국 숟가락 쓰는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봐라. 취향은 더 안 맞아라. 너는 스포티파이를 쓰고 이자벨 위페르를 보는데 그는 미스터트롯을 부르고 마동석에 환장해라. 그래서 머릿속으로 내 생각을 한 번쯤 하게 돼라. 예민하지만 괜찮은 사람이었어. 아니야, 그래도 무던한 사람이 낫지. 끝없이 고민해라. 그리고 몇 번의 애프터 끝에 결국 나만 한 사람 없었지, 귀갓길에 후회하고 엉엉 울어라. 술독에 빠져 망신당해라. 그러다 나한테 다시 문자하면······


나도 똑같았다고 할게. 나도 그랬다고, 미안하다고 말할게.


이기심도 시간 지나 벌어지는 둔각 같아

난 그냥 둔감한 사람이고 싶었는데 말이지


어이없지

내가 이런 말을 남긴다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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