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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분 Jun 30. 2022

너라는 필터


부지런한 하루를 보내고 맞이한 저녁.


아이는 나와 함께 침대에 누워 책을 두어권 읽은 뒤,

토끼와 멍멍이 그림자를 불러내 그 날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보내준 다음,

생각나는 사람들을 몇 번이고 부르며 무엇을 하고있을지 궁금해하다가-이 때 아이는 꼭 내 얼굴을 양손으로 야무지게도 감싸쥐고 있다-,

이내 머리며 귀며 엉덩이까지 이곳저곳 긁어달라 하고선 그 손길에 취한 듯 스르르 잠이 든다.


하루 중 가장 포근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어서 잠들었으면 하는 조급함이 스며들어있는 시간이다.

그 조급함은, 우리가 언제나 그렇듯, 익숙함이 소중한 순간을 잠식해서 생기는 것이리라.

종종 잠들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어진다 싶으면 어서 자라며 짜증섞인 목소리로 재촉하곤 한다.

그러고는 맑디맑은 아이의 잠든 얼굴을 보며 꼭 후회하는 것이다. 아, 조금만 더 참을 걸.


오늘 아이는 잠들기 얼마 전, 내게 돌아누우라고 했다.

평소에는 꼭 자기쪽을 보고 누우라고 하던 아이라 의아해하며 돌아누웠다.

아이의 손이 내 등을 토닥인다.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가, 엄마를 재워준다며 부드럽게도 손을 놀린다.

몇 번 두드리면 팔이 아파 그만둘 법도 한데 제법 열심이다.

피식 웃음이 나오는가 싶더니, 아이의 손길이 등을 뚫고 심장까지 토닥이는 듯한 느낌에 눈물이 왈칵 차오른다.


아, 나는 오늘 위로를 받았구나.

그저 토닥임 번일 뿐인데, 아이의 손을 거치니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위로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런 순간은 오늘이 처음은 아니었다.


아이가 처음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는 발끝마다 꽃이 피는 것같아 내 걸음마저 새롭게 느껴졌다.

아이가 흥에 겨울 때 나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춤사위는 어떤 이든 웃게하는 묘약으로 보였다.

아이가 엄마! 하며 나를 힘차게 부를 때는 온 세상에 엄마가 나밖에 없는 듯 뿌듯함이 가슴가득 차올랐다.


그 뿐이랴.

모두 함께 숨쉬는 공기마저도 아이의 손과 눈과 입을 거치면 그것은 오직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선물처럼 느껴진다.


오늘 내 등을 토닥이던 그 작은 손길은 순식간에 내 가슴 한가운데에 깊은 뿌리를 내렸다.

그 나무가 아이와 함께 자라나 언젠가는 내 몸 구석구석 어디 하나 안닿는 곳이 없게 되면,

그 때는 아이의 가슴에도 새로운 나무를 심어야할 때가 가까워질 테다.

그 때가 되면 아이를 통해 보았던 아름다운 세상들이 나를 살아가게하는 힘이 되리라.

그 때는 이미 내 품을 벗어나 어른이 되었을 아이에게도 내가 본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지기를 지긋하게 바라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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