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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분 Aug 02. 2021

혼자 있고 싶다는 게 널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야

사랑하기에,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



저녁식사를 마치고 남편과 아들은 산책을 나섰다.

덕분에 내게 주어진 시간은 약 한 시간.

무엇을 해야하나 고민하는 시간마저 아까울 만큼 마음이 조급하다.



낮에 쓰다 만 글을 마저 마무리지을까?

아니, 일단 먼저 씻을까?

아니, 그건 이따 해도 되니까 지금은 그냥 좀 쉴까?

아니야, 그건 너무 아까워. 잠깐이라도 책을 좀 읽을까?

그러기엔 지금 읽는 책은 집중이 필요한 일이야. 시간이 촉박하면 읽어도 읽은 게 아니야.

아, 아무래도 식탁을 먼저 치워야겠다. 그래도 할 일은 해놓고 뭘 해도 해야지.

간단히 먹은 탓에 그릇은 많지 않다. 얼른 끝내놓고 다른 일을 하면 된다.



싱크대에 그릇들을 옮겨 넣은 뒤 고무장갑을 끼다 말고 휴대전화를 집어들었다.

설거지에 음악이 끼어들면 노동이 아니라 색다른 취미가 되는 법이니까.

오늘의 테마는 추억여행. 작은홈피 배경음악으로 인기가 많았던 곡들을 모은 재생목록을 튼다.

여기서 중요한 건 블루투스 스피커로 들어야 한다는 것.



달그락거리는 그릇들 사이로 스며든 익숙한 노래가 춤을 춘다.

급기야 내 손발에도 흥이 차오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중간중간 혹여 아이가 넘어지진 않는지, 못먹을 것을 입에 넣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화장실 바닥을 기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침대 위로 올라가려다 미끄러지는 참은 아닌지 등등을 살피지 않아도 된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그릇이 잘 닦이는지만 살피면 되는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노래가 나오면 그저 고무장갑 한 쪽만 벗어낸 뒤 다음 노래로 넘기면 되는 것이다.



내 몸 구석구석에 달려있으면서 모든 순간 아들을 향해 움직이는 수십개의 눈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듯하다.

하루종일 쉴새없이 눈알을 굴리다 비로소 잠시나마 휴면상태가 된 것이다.

몸이 가벼워지면서 상쾌한 기분마저 든다.



아, 혼자 있는다는 건 이런 것이었지.

그저 멍하니 내가 숨을 쉰다는 사실마저 잊어도 되는 시간이었지.

참 좋은 것이었구나.






생각보다 오래 걸린 설거지를 마치고 손빨래하려고 빼두었던 남편 셔츠를 서둘러 빨았다.

거실에 널브러진 장난감들을 나름의 질서에 맞추어 정리한다. 티나지 않게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그래도 뭘 하려면 상쾌한 기분으로 해야지 싶어 씻고 나와 서둘러 소파에 자리를 잡는다.

아무래도 글을 보충하는 것이 좋을 듯해 노트북을 켜고 쓰던 글을 훑어보려는 찰나,



삑 삑 삑 삑 삑 -

현관문이 열렸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과 아들의 얼굴이 달아올라있다.

나를 발견하고선 개구쟁이 미소를 지어보이는 아들을 보자 온몸이 간질간질해진다.

아기띠를 메고 뿌듯한 미소를 짓는 남편과 눈이 마주치고 나니 더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다.



나의 하루에 사계절이 다 들어있다고 하면, 함께인 시간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맑고 흐린 대부분의 날이겠다. 그러다 혼자인 시간은 어쩌다 있는 비내리는 날일 테다. 그렇게 비옥한 바탕을 만들어내고, 꽃을 피울 힘을 보태주는 것일 테다.



더욱 말끔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기 위하여,

뜨겁지만 메마른 사랑보다는 알맞게 촉촉한 사랑을 영영 뿜어내기 위하여 나는 더욱 더 혼자만의 시간을 갈구하겠다.

그것은 더 잘 사랑하기 위한 나의 진심임을, 혼자했던 설거지를 떠올리며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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