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23 2022
(커버 이미지 : 버지니아와 웨스트버지니아의 경계, 애팔래치아 산맥을 따라 난 I-64 도로 풍경. 나무 가지에 쌓였던 눈이 잠시 녹았다가 다시 얼어붙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구슬처럼 반짝였다. 그렇게 빛나는 눈얼음 가지는 내가 지금껏 본 적 없는, 정말 희귀한 광경이었다.)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미국의 '이야기'를 찾아 여행을 가고 싶다.
미국에 온 지도 어언 1년 6개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기간 동안, 모든 주말을 열정적으로 살아온 덕에 세은이가 가고 싶어 했던 곳들도 모두 다녀왔고 한국에 알려진 유명 미국 관광지들은 얼추 다녀온 상태가 되었다.
2~3년 정도만 미국에 머물게 되는 주재원들은 한국에 돌아가면 미국에 다시 올 수 없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무리를 해서라도 최대한 시간과 돈을 써가며 여행을 다니곤 한다. 그러다 보니 보통의 미국인들이 평생 다니는 것 보다도 훨씬 많은 곳을 여행하기도 하는데, 같이 일하는 몇몇 주재원들은 이미 많은 곳을 다녀온 터라 '미국을 정복했다'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정복'이라는 표현은 좀 과장이긴 해도 그만큼 많이 다녔다는 것이니 그 기분이 이해된다.
주재원들 중 친분이 있는 사람들끼리는 같이 뭉쳐 다니기도 하고 서로서로 여행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기에 다들 비슷한 곳을, 비슷한 모습으로 다녀오게 된다. 그러다 보니 주재원들 사이에는 복제된 '숙제 목록'같은 것이 생기고 그것을 완성한 '정복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광활한 미국 대륙을 정복(?)해 버린 그들에겐 미국은 이제 시시한 곳이기 때문에 한국에선 가기 힘든 아이슬란드 같은 북유럽이나 중남미 같은 곳으로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달랐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서 유명한 장소를 몇 군데를 다녀와서 정말 정복했다고 할 수 없지 않나? 왜냐면 미국에서 외국인으로 살고 있는 우리는 현지인보다는 턱없이 부족한 정보와 상식으로 판단하게 되고, 우리에게 알려진 곳들은 '한국에서 여행으로 접근이 가능한 곳'만을 부각해서 말하는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미국에 와서 살고 있으니 미국인들이 할 법한, 한국스타일이 아닌 미국에서만 할 수 있는 형태의 여행을 하고 싶다. 그런 이유로 나는 아내에게 한국에 돌아갈 때까지 유럽이나 남미 같은 곳은 가지 말고, 미국 여행만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려면 열심히 알아보고 공부를 해야 했다.
한국에서 멀리 간다고 하면 서울-부산 정도인 4~5시간 정도가 어느 정도의 기준이 된다. 하지만 미국은 밤새 달려도 끝없는 그야말로 대륙 그 자체. 그러니 미국에서만 할 수 있는 여행이라면, 비행기로 다니는 것보다는, 당연히 며칠씩 끝없이 운전하면서 여행하는 로드트립일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이미 여러 차례의 경험(NY에서 FL 2회)을 통해 초장거리 운전이 가능함을 입증했기 때문에, 미국에서 맞는 마지막 크리스마스, 이번 연말 연휴엔 절대적으로 기념비적인 여행을 하고 싶어졌다. 그동안 머릿속에만 있던 것들을 종이에 적어보았다.
- 겨울이니 당연히 플로리다로 가야지. 운전하는 중에 계절이 겨울에서 여름으로 바뀌는 경험은 미국에서만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번이 미국에서 맞는 마지막 겨울이니까.
- 세은이가 KFC 치킨을 유독 좋아하니 켄터키 한번 가자. 켄터키에서 KFC를 찾아가면 재밌겠다.
- 1월 학교 휴일 중에 'Martin Luther King's day'가 있는데, 이것을 왜 기념하는지 공부하고 오면 좋겠다. Atlanta, Georgia에 그의 생가가 있고 코카콜라 본사도 있으니 세은이가 좋아할 수도 있겠다.
과연 이 모든 것을 다 풀어낼 수 있는 경로가 나올까? 아내와 머리를 맞대고 며칠을 고민한 끝에 마침내 9박 10일짜리 일정을 완성하였다.
금요일 저녁에 Albany를 출발해서 Washington DC에 도착해서 하루를 보내고, 버지니아를 가로질러 켄터키까지 가서 '켄터키 할아버지'의 첫 번째 가게를 구경하고, 역시 켄터키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긴 동굴을 구경하고 나서 코카콜라 본사가 있는 Atlanta로 이동. 이곳에서는 Martin Luther King의 역사를 공부하고 마지막으로 플로리다로 가서 서쪽과 동쪽 해변 각각을 구경하고 뉴욕으로 돌아온다. 총 이동거리 3,200마일=5,100km에 달하는 초 장거리 로드트립이다.
중간중간 묵게 될 호텔은 아내가 열심히 찾아서 예약을 다 마쳤는데 모든 사람이 여행하는 시즌인지라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비행기 여행이 아니어서 비용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한 것도 사실이다.
이웃들은 내가 당연히 크리스마스에 여행을 간다고 생각해서 우리 가족의 다음 행선지를 궁금해했다. Owen을 만났을 때 이번 여행 일정을 설명하면서 "켄터키엔 KFC에 가서 치킨 먹으러 가요"라고 했더니 엄청 크게 웃으면서 어처구니없어했다.
"켄터키는 대학 야구나 경마 아니면 위스키 사러 가는 곳이야. 너처럼 치킨 먹으러 가는 애는 처음 봤다."
이웃들의 기대와 응원을 안고 올해 마지막 여행, 그야말로 대륙 스케일의 로드트립을 시작한다.
이번 여행의 첫날 목적지 Washington DC는 이미 작년에 한번 다녀온 터라 길이 낯설지는 않다.
하지만 큰 난관이 생겼으니, 며칠 전부터 뉴스에서는 엄청난 한파가 미국 동부를 들이닥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었다. 출발 전날에도 가급적 불필요한 여행을 피하고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보내라는 경고성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어쨌거나 일단 뉴욕만 벗어나도 추위는 괜찮겠지 하는 생각으로 세은이 학교 끝난 뒤 곧바로 대장정을 위한 운전을 시작했다.
뉴스 예보대로 영하의 기온에 날은 잔뜩 흐리고 고속도로에 살짝 눈이 오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눈구름이 북쪽에서 남하하기 시작하는 중이어서 아직 눈이 많이 쌓이지 않아 운전은 그럭저럭 할 만했다. 하지만 이런 날씨에 이동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눈 속에 갇힐 수도 있기 때문에 눈폭풍에 추월당하지 않으려 최대한 빠르게, 쉴 새 없이 남쪽으로 도망쳤다. 아내와 세은이에겐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하긴 했어도 미국 북쪽 동네에서는 눈 속 고립이 실제로 종종 일어나는 일이어서 농담인 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쉼 없이 7시간여를 달려서 한밤중이 되어 Washington DC에 도착했다. Washington DC 시내에는 자체 주차장이 없는 호텔이 많아서, 가까운 주차장을 따로 예약하고 짐을 들고 15분 정도를 걸어야 했다. 우리는 뉴욕에서 충분히 남쪽으로 내려온 것이지만 'Historical cold'라는 표현에 걸맞게 걷는 동안 귀가 떨어질 만큼 추웠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인 거리를 '너무 추워'를 연발하며 촐랑대며 뛰던 세은이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녹아내리듯 잠에 들었다.
아내와 맥주 한잔 하면서, 운 좋게 악몽을 피하면서 시작된 여행이 별 탈 없이 끝나기를 바랐다.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