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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Jun 18. 2024

꿈을 깬 여자와 꿈을 꾼 남자

도스토옙스키, <백야>


꿈은 꾸어야 하는 것일까, 깨어야 하는 것일까? 한 사람에게 애증의 감정이 공존하는 것처럼 꿈은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이다. 꿈은 비전과 이상, 유토피아와 북극성인 동시에 허무와 공상, 헛됨과 신기루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야>에는 꿈속에서 몽롱하게 살아가는 남녀가 등장한다. 남자는 주인공인 몽상가, 여자는 나스텐카라는 소녀다. 도스토옙스키의 위대한 만큼 읽기 힘든 벽돌책만 보다가 처음 단편을 접한 기쁨도 잠시, 내 마음은 벽돌처럼 굳어졌다. 


<백야>는 얼핏 보면 페테르부르크의 아름다운 백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순수한 남녀의 로맨스 소설인 듯싶다. 그러나 나는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불쾌감을 느꼈다. 나스텐카를 보며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군 복무 시절에 <아내가 결혼했다>를 처음 읽고 잠을 이루지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현실주의자인 나는 좀처럼 소설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어쩌다가 읽었는지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속으로 쌍욕을 하며 밤새 책을 붙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닫힌 변기 뚜껑 아래 무엇이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들춰보려는 유혹을 떨치지 못하듯 아내가 남편 외에 사랑하는 남자가 생겨서 세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내용이 지저분하면서도 매혹적이었다. 보수적인 경상도 부모님 밑에서 자랐고 남고, 공대를 거쳐 군대로 직행한 내겐 크나큰 충격이었다. 아내가 하는 말이 결국 개소리이고 궤변일 뿐인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서 짜증이 났다. 


나스텐카가 순수한 척 지껄이는 말도 결국 상대를 비참하게 만드는 감미로운 망발일 뿐이었다. 그녀는 앞을 못 보는 할머니와 핀으로 고정된 끈에 연결된 채 중국 왕자에게 시집가는 공상에 사로잡힌 플러팅의 고수이다. 그런 그녀에게 꽂힌 주인공 몽상가는 여성의 모성애와 존경심을 동시에 자극하는 작업의 선수이다.


이성 친구끼리 연애 상담 해주다 연인으로 발전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나스텐카와 몽상가도 딱 그런 케이스로 서로 눈이 맞았지만, 결국 몽상가는 나스텐카에게 눈탱이를 맞으며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나스텐카는 "오, 세상에! 당신과 그 사람, 두 분을 동시에 사랑할 수만 있다면! 아, 당신이 그 사람이었더라면!"이라는 괴상 야릇한 화법을 구사하며 원래 흠모했던 남자와 결혼해 버린다.


정신적으로 눈탱이 밤탱이가 된 몽상가는 모욕감에 눈물을 흘린다. 뭐에 씌었던 눈이 씻겨졌기 때문일까. 그가 실컷 운 뒤에 바라본 세상은 갑자기 늙어버렸고 바랬으며 빛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현실에 눈을 감고 나스텐카의 행복을 빌어주며 몽상가의 길을 택한다.


몽상가는 바로 도스토옙스키 자신이 아닐까 싶다. 그는 나스텐카라는 공상적 사회주의의 쓰라린 현실을 직시한다. 하지만 그는 사회주의의 북극성이 더 높고 찬란하게 빛나길 바라는 꿈을 여전히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몽상가는 "어리석은, 완전한 무無, 그저 한낱 꿈에 불과했으니까요!"라고 말하는 동시에 "오, 세상에! 지극한 기쁨의 완전한 순간이여! 한 사람의 일생이 이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라고 부르짖은 게 아니었을까.



[이학기 반장 연재]

월 : 이학기 스쿨의 월요일 진로반
화 : 이학기 스쿨의 화요일 독서반
수 : 이학기 스쿨의 수요일 작가반(끝)
목 : 이학기 스쿨의 목요일 직장반
금 : 이학기 스쿨의 금요일 고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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