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라 늘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팀장님, 저 속상해서 못 해 먹겠어요. 오픈하자마자 환불이 들어왔는데 여러 번 착용했던 흔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고객이 한 번도 안 입었다면서 박박 우기는데 환불을 안 해줄 수도 없고 정말 미치겠네요!"
"팀장님, 저 정말 억울해요. 고객 두 팀이 동시에 매장에 들어와서 정신없이 응대하고 있었거든요. 그때 다른 고객 한 분이 또 들어왔는데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이야기했거든요. 잠시 둘러보더니 조용히 나가서는 바로 고객센터로 올라가 클레임을 걸었더라고요. 제가 자기를 무시했대요!"
엄마, 이모뻘 되는 점주들은 아들, 조카뻘 되는 너에게 이렇게 울면서 하소연을 할 때도 있었다. 미국의 존 워너메이커는 젊은 시절 상점에서 겪은 불친절한 응대를 마음에 새기며 세계 최초로 백화점을 설립했다. '고객은 왕'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창시한 그는 훗날 '백화점의 왕'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당시 너가 가장 존경하던 인물이 바로 존 워너메이커였다. 백화점의 왕이 만든 철학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너 역시 그처럼 훌륭한 인물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고객은 왕이 맞지만, 과연 모든 고객이 왕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간관계의 갈등은 항상 양쪽의 입장을 충분히 들어봐야 한다. 하지만 객관적인 증거가 있다 해도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피해자를 한순간에 가해자로 만들 수도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고객 센터로 불려 가면 너는 관리자로서 깊은 딜레마에 빠졌다. 고객이라고 무조건 옳은가, 점주라고 무조건 틀렸는가?
점포의 모든 직원에게 항상 친절하려고 노력했던 너였지만, 유독 고객 센터와는 친해질 수가 없었다. 고객의 잘못이 명확한 경우에도 점주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고객 센터에 너는 불같이 화를 내며 점주의 입장에 대해서도 변호를 했다. 너에겐 소비자도 고객이지만, 점주 역시 고객이었기 때문이다. 너의 엄마, 이모가 점주로 일하는데 진상 고객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너의 대처는 회사에서 규정한 관리자의 행동 지침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분명 고객 센터에서도 비협조적인 너를 지점장에게 여러 번 보고했을 것이다. 고객을 최우선으로 클레임을 처리해야 하는 그들에게는 그게 합당한 처사였을 테니까. 하지만 한 번도 지점장은 너를 꾸중한 적이 없었다.
클레임이 발생했을 때 점주들은 대부분 고객의 입장을 배려하고 그들의 선에서 잘 처리한다. 그런데 너한테 달려와서 울며 하소연할 정도의 사태는 분명 고객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증거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지만, 가끔 멀리서 보면 비극 같은데 가까이서 보면 희극 같은 일도 일어난다.
어느 점주가 사건 발생 후 나중에 고백한 내용인데 한 번은 어느 고객이 금요일에 밍크코트를 구매해서 주말이 지나자마자 월요일에 환불을 해 간 적이 있다고 했다. 옷에는 담배 냄새, 음식 냄새가 배어 있었고 점주는 그 고객이 주말 모임에 잠깐 입을 목적으로 구매가 아닌 대여(?)를 시도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점주는 한 번도 입은 적이 없다고 우겨대는 고객에게 몇 백만 원이나 하는 돈을 환불해 주고 몹시 괴로워했었다. 정신을 차리고 반품된 밍크코트를 정리하는데 주머니에서 현금 10만 원이 나오는 게 아닌가? 점주는 고객이 놓고 간 세탁비를 감사히 잘 썼다고 했다.
한 번은 또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이 있었다. 직장인 중 이직의 달인들이 자주 회사를 옮기듯 점주들 또한 브랜드와 브랜드를 옮겨 다니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한 점포 내에서도 여러 브랜드를 갈아타기도 한다. 배옥자 점주도 '후라지크' 브랜드에 있다가 '캐리다일' 브랜드로 소속을 옮겼다.
그런데 얼마 후 배옥자 점주에게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아들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배옥자 점주는 상을 치르고 아직 슬픔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다시 출근했다.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하는데 얼마나 힘들지 감히 너는 위로해 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 도울 수 있는 길은 관리자로서 배옥자 점주가 맡은 캐리다일 브랜드의 매출이 오르도록 관리해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배옥자 점주도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한번 힘을 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 너의 팀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후라지크 점주가 잔뜩 흥분한 채로 달려와 당장 지금 캐리다일 마네킹 좀 보라며 너를 닦달했다. 무슨 일이가 싶어 너도 한 걸음에 캐리다일 매장으로 갔다가 그만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배옥자 점주가 캐리다일 브랜드 메인 마네킹에 코디해 놓은 단가 높은 퍼상품이 바로 후라지크 브랜드의 상품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캐리다일과 후라지크 매장은 서로 등을 마주대고 붙어있었기에 사태는 더욱 심각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이었을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배옥자 점주가 후라지크에 근무할 때 브랜드 본사에서 요구한 마감 매출을 맞추려고 본인의 카드로 퍼상품을 가구매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보통은 이렇게 가구매를 하면 다음 달에 반품 처리를 하기 마련인데 배옥자 점주가 갑작스럽게 캐리다일로 옮기게 되면서 반품 처리를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배옥자 점주는 요즘 자기가 제정신이 아니라서 아무 생각 없이 그 상품을 판매하려고 마네킹에 코디했는데 정말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고객에게 판매가 된 것도 아니고 배옥자 점주의 개인적을 상황을 고려할 때 실수라고 볼 수 있었다. 배옥자 점주가 후라지크 점주에게 정중히 사과하면 일단락될 사건이었다. 그런데 왜 팀 전체가 발칵 뒤집혔을까?
사실 후라지크 점주와 배옥자 점주는 라이벌 관계였다. 브랜드도 서로 경쟁 관계였고 매장도 서로 딱 붙어있으니 늘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배옥자 점주의 말을 들으면 항상 후라지크 점주가 자기를 괴롭힌다고 했고, 후라지크 점주의 말을 들으면 그와 정반대였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인 사실은 후라지크 점주가 팀 전체 점주를 대표하는 점주 회장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층 전체로 일파만파 퍼졌고 점주 회장의 영향력을 감안할 때 여론이 점주 회장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배옥자 점주는 순식간에 죄인으로 낙인찍혔고 퇴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는 배옥자 점주의 입장도, 점주 회장의 입장도 모두 이해가 갔기에 그 어느 편을 들 수가 없었다. 최연소 팀장으로서 이제 조금 적응해가나 싶었더니 리더십에 큰 위기를 맞이하고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이 난국을 돌파해야 할까.....?
(8화에 계속...)
[이학기 반장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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