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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Oct 14. 2024

{강의} 프리랜서로서 첫 직무 강의

현직자 시절, 첫 직무 강의는 '유니콘기업 이커머스 MD에게 배우는 데이터기반 매출 전략 기획'이었다. 이 강의를 제안한 교육 플랫폼 매니저에게 퇴사 소식을 알렸다. 그녀는 대뜸 "진짜 축하드려요. 너무 멋지세요!"라며 조만간 만나자고 했다. 누군가는 미쳤다고 했던 퇴사가 이렇게 축하받을 정도로 멋진 일이었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퇴사 스토리를 나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도 퇴사를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나의 앞길을 응원한다며 교육 플랫폼 임원 미팅을 주선해 줬고 임원과 2시간 가까이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그때만 해도 퇴사와 동시에 바로 전속 강사로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까지 절대 속단해서는 안된다는 걸 배웠다.)


B2B, B2C, B2G 교육 등 여러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시기적으로 정부지원사업인 B2G부터 한번 협업해 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퇴사와 동시에 강의라니, 일이 술술 풀리는 것 같았다. 첫 직무 강의 때는 주 1회 3시간씩 총 4주간 12시간을 진행했는데 이번에는 2주간 6일에 걸쳐 총 21시간짜리였다. <매출 1등 MD는 이렇게 팝니다>도 출간됐겠다, 기존 강의 자료도 있겠다, 해볼 만하겠다고 느껴 수락했다. 무엇보다 내겐 닥치는 대로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2023년 12월, 강의 준비를 위해 연말을 분주히 보냈다. 21시간 강의 커리큘럼을 짜고 강의 자료를 보강하고 나니 2024년 새해가 밝았다. 퇴사 후 프리랜서가 되어 맡은 첫 강의 제목은 '서울시 청년취업사관학교 광진캠퍼스 2기, 데이터 드리븐 온라인 패션 MD'였다. 한 마디로 정부지원사업 MD 교육이었고, 약 35명의 취준생(소수의 창업 준비생 포함)이 그 대상이었다. 이미 직무 강의를 해본 적이 있고 책을 쓰며 지식을 한번 더 정리해 둔 터라 크게 부담이 되지는 않았지만, 프리랜서 강사로서 첫 평가를 받는 자리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새로운 출발로 새해를 맞이하며 싱그러운 새 얼굴을 만나니 에너지가 솟았다. 강의 시작 하루 전날에 수강생들의 정보를 뒤늦게 받은 점이 아쉬웠지만, 사전에 매니저를 통해 얻은 정보대로 준비한 커리큘럼으로 2일 차까지 자신 있게 끌고 나갔다. 그런데 2일 차 강의 말미 Q&A 시간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강사님, 오늘 자소서 준비를 비롯해 합격 꿀팁까지 전반적으로 내용이 알차서 좋았는데요. 너무 어렵게 느껴져요. 저희는 처음 취업을 하는데 강사님의 설명은 경력 이직자에게 도움이 될 것 같거든요. 강사님이 처음 취업하셨을 때의 자소서는 없으신가요?"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좀 더 양적으로, 질적으로 나은 내용을 알려주고 싶어 준비한 것이었는데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고객의 정확한 니즈'를 놓친 것이었다. 15년 가까이 온, 오프라인 커머스에서 그토록 고객, 고객, 또 고객을 외쳤건만, 그동안의 고생이 수포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앞으로 15시간이 남아있는데 어떻게 하지?


집에 왔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회사는 1년에 한 번 성과 평가를 하지만(물론 중간 평가도 있긴 하지만, 진짜 평가는 연말 평가다), 강의는 그 즉시 평가와 피드백이 뒤따르기에 돌파구가 필요했다. 기업 교육 워크숍을 설계하고 진행하는 퍼실리테이터인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형, 저 큰일 났어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하하, 그래. 내가 지금 워크숍에 와 있어서 길게 통화는 못하지만, 들어보니 간단하게 변화를 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같아. 우리 회사에서 기업 교육을 설계할 때는 학습자끼리 서로 학습할 수 있도록 소그룹 나눔을 하거든. 일방적으로 지식 전수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습자들이 취업 경험이 없을 뿐이지 다른 경험은 많이 했을 거잖아. 그러니 서로 토의하고 서로에게 배울 수 있도록 한번 진행해 보면 어떨까?"


지인의 몇 마디가 나의 관점을 180도 바꿔주었다. 역시 전문가는 다르구나 싶었다. 지인의 말을 곱씹으며 다음날 진행할 커리큘럼과 강의 자료를 수정했다. 그리고 매니저에게 전화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좀 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진행 방식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매니저는 원래 강의를 다 마친 후에 진행하려고 했던 커피챗 시간을 다음날 강의 전에 3시간 정도 소그룹으로 진행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이로써 총 24시간짜리 강의가 되었다.


Q&A 시간에 요청받은 대로 내가 첫 신입 입사 때 썼던 자소서를 찾았는데 다시 보니 도저히 공개할 수 없는 수준이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라떼도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취업이 참 힘들었다고 했었는데 나는 참 운 좋게 취업했던 것 같다.) 급한 대로 신입 입사한 후배들에게 연락해 동의를 구하고 그들의 자소서를 확보했다. 취준생들에게 공유해 주면 도움이 많이 될 테니까.



다음날, 나는 사전에 계획하지 않았던 급조된 커리큘럼으로 소그룹 커피챗과 소그룹 나눔을 진행했다. 소그룹 커피챗을 통해 카페에서 2~3명씩 번갈아가며 밀착 취업 컨설팅을 해주었다. 소그룹 나눔 때는 5명의 창업 준비생을 따로 모아 창업 관련 토론도 진행했다. 취준생 위주로 구성된 강의라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고객 중심으로 눈을 돌려 철저히 그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자 1주 차 때 4점 초반이었던 강의 평가가 2주 차 때는 4점 후반까지 치솟았다. 특히, 내게 최악의 점수를 주며 가장 비판적이고 시니컬했던 수강생이 강의 최종 평가 때는 만점을 주었고, 강의를 마친 후 내 책에 사인을 받으려고 남아있는 모습에 울컥하기도 했다. 그래. 고객, 고객 또 고객은 언제나 옳다.


멋모르고 호기롭게 도전했다가 호되게 당한 나는 지인 회사에서 진행하는 '러닝 퍼실리테이션'이라는 교육을 정식으로 받았다. 러닝 퍼실리테이션이란 '가르치지 말고 스스로 배우게 하는 교수법'이랄까? 드넓은 커머스 세계 외에도 더 넓고 다양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러닝 퍼실리테이션을 학습한 내게 만일 다시 MD 교육을 하라고 한다면 강의 자료와 커리큘럼 자체를 싹 다 갈아엎을 것이다. 그만큼 내게 유익하면서도 충격적이었던 교육이었다. 앞으로 나는 또 어떤 교육을 하게 될까? 그땐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교육을 마치며 서울시 청년취업사관학교 광진캠퍼스 2기와 함께 기념으로 촬영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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