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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pt Oct 27. 2024

‘준비’가 되면, 앞으로 ‘나오세요.’

JH와 함께 일을 하게 된 이후로, 혼자만의 습작이 아닌 계약을 맺은 아이템을 기획개발하면서, 작업 루틴을 정착시키려고 이런저런 시도와 테스트를 계속 했다. 디스크가 도지거나 코로나에 걸린 적도 있었고, 계절성 우울증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몸과 마음이 가라앉는 상태를 겪은 적도 있다. 밤새 에너지가 뻗쳐나와 이틀을 꼬박 새면서, 잠깐씩 침대에 몸을 뉘였다가 다시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가 다시 침대에 잠깐 누웠다가를 반복하며 자판을 두들기는 날도 있었다. 


먹는 시간, 잠드는 시간, 산책과 운동을 할 시간을 수십가지로 쪼개기도 했고, 타임 타이머로 하루에 일할 시간을 몇 개의 세션으로 나눠 그걸 유지하려고 하기도 해봤고, 아이디어 구상을 하기에 알맞은 향초, 구체적인 장면을 써내려가야 할 때 집중이 잘 되어 시나리오 진행이 잘 되던 날 갔던 카페의 같은 자리에 앉아 똑같은 작업속도를 재현해보려고 한 적도 있다. 


사무실에 아침 일찍 나가서 쓸 때, 집에서 창문을 다 열어놓고 쓸 때, 집 앞 카페의 불편한 의자에 앉아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을 끼고 쓸 때, 아침에 통밀빵을 먹었을 때, 저녁을 샐러드로 대체했을 때, 운동 시간을 앞당겼을 때, 운동 시간을 늦췄을 때, 아침에 로잉머신을 하고 곧바로 책상에 앉았을 때, 찬물 샤워로 하루를 시작했을 때....


나는 찾고 싶었다. 가장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가 어떨 때인지 말이다. 나와 나의 동료 작가들이 함께 회사의 아이템을 가지고 지지고 볶으면서, 사무실 재떨이를 한자리에서 두 번씩은 갈아야할 만큼 브레인스토밍을 곁들인 자신의 상태체크와 현재 유용하다 여겨지거나 테스트 중인 온갖 루틴에 대한 난상토론을 벌이며 한 해가 저물어갔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린 매우 많은 양의 글을 썼고 그 글을 고쳤고, 회의를 했고, 다시 고쳤다.  


어느날, 이 모든 것이 내가 앉아 있는 의자 탓이라는 결론을 내린(?)  나는, 가장 고가의 의자를 풀옵션 4년 리스로 질렀다. 따로 주문한 헤드레스트가 도착한 날, 그걸 의자에 결합한 뒤 나는 향을 피우고 적당한 조도의 조명을 켜고 방 한 가운데 요가매트를 펼쳤다. 저 빛나고 거대한 의자에 앉아 밤을 지샐 수 있는 몸상태인지 스트레칭을 하며 체크를 해보겠다는 생각을 하던 나는. 문득 헛웃음이 났다. 


주짓수 체육관에 등록한지 2-3주쯤 되었을 때, 

나는 겨우 용기를 내 카운터에 앉아 있던, 다 헤진 브라운 벨트를 맨 사범님에게 질문을 했다. 


‘언제 스파링을 시작해야 할까요?’

‘그 맘이 드셨으면 이제 하면 되실 거 같은데요.’

‘그런데 전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데요. 뭘 어떻게 해야될지 감도 안 잡히고, 도무지 몸에 익숙하지도 않아요.’

‘자전거 처음 탈 때 무슨 준비를 하셨습니까? 하면서 익히면 됩니다.’


스파링을 한 지 첫 일주일이 지났을 때, 스파링을 할 때마다 정말이지 말그대로 체육관 바닥을 내 도복으로 청소를 하러 왔나 싶을 정도로 바닥에 깔려 버둥거리기만 하던 나는 또 질문을 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어요. 배운 게 하나도 기억이 안나요. 

아님 뭘 해볼려고 해도 제 몸이 전혀 생각대로 안 움직어요. 

오늘 사범님이랑 5분동안 하면서 탭을 10번 넘게 쳤잖아요!’

‘그 10번이 9번이 되고 8번이 되면 됩니다.’ 


몇 달 뒤, 오랜만에 사범님과 한 스파링에서, 나는 5분 동안 다섯 번의 탭을 쳤다. 골골대고 헉헉대며 사범님의 가드패스를 막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내 이마엔 땀이 흥건하게 맺혔는데, 사범님의 앞머리는 뽀송뽀송했다. 하지만, 그날, 사범님은 목 언저리에 파스를 붙이고 있었고, 나는 삔 손가락에 테이핑을 잔뜩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걍 하는 거다. 지금의 내가 최선의 나다. 평소실력이 나다. 평소의 내가 조금씩 변해가는 거다. 첫 스파링을 하고 반드시 그 다음 한 판은 쉬어야 했던 내가 연달아 서너번의 스파링을 할 체력이 되는 거다. 시합 3주 전부터, 저녁 수업 두타임을 다 채우고, 수업 사이 쉬는 시간에 나보다 높은 띠의 선배들과 스파링을 할 체력이 되면, 시합에 나갈 마음이 꺾이지 않는 거다. 


하루에 다섯시간만, 다른 생각이나 와이파이조차 활성화되지 않는 상태로 만들어놓고 오로지 자판만 두들기자고 마음 먹은 어느 한주동안, 나는 완전히 새로운 아이템의 기획안을 끝냈다. 하지만, 어떤 날은 낮과 밤이, 배고픈 시간과 졸린 시간이 나의 예상을 아득하게 빗나갔고, 나는 반은 잠든 상태로, 반은 깬 상태로 며칠을 보냈다. 그런데, 그 며칠 동안에도, 머릿속에 굴리는 생각은 멈추지 않았고, 시간이 되면 운동을 갔고, 집으로 돌아와 씻고 잠을 청해야 할 컨디션이라 생각하면서도 책상에 앉았다. 


이것도, 저것도 지금의 나다. 나의 평소실력, 나의 보통의 대강의 상태가, 지금의 나의 퍼포먼스의 전부다. 며칠을 말아먹으면 며칠 안에 되돌아올 것이다. 며칠 잘 굴러갔으면 며칠 삐걱댈 수도 있다. 그건 아무 상관이 없다. 그만두지 않을테니까. 


그러니까, 매일 매트 위에서 스파링 직전에 듣는 문장은, 나의 상태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동을 기다린다. 행동은 상태를 대변한다. 혹은 견인한다. 또는, 그 둘은 같다.


‘준비’가 되면 앞으로 ‘나오세요.’


완벽을 바라지 말고, 순간순간의 상태에 휘둘리지 말고, 나의 ‘평소’ 상태를 진일보시킬 것. 

쉽고 뻔하게 말하자면, 길게 보는 법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주짓수를 그만두지 않고 계속하다보면, 당연히 그렇게 길게 볼 수 밖에 없지 않겠나 싶기도 하다. 이 놈의 운동은 그렇게 최소 10년을 해야 까만띠라고. 에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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