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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pt Oct 27. 2024

언젠가는 상상도 않던 그 때가 온다. 첫 시합.

시합에 나서기 싫은 이유는 차고 넘친다. 자신의 몸상태에 생업이 달린 직장인들에게, 혹시 모를 부상의 위험은 가장 큰 걸림돌이 될테고, 홈트나 스트레칭이나 유산소 운동을 대신할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체육관에 나와 소위 ‘행복 주짓수’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시합장에서의 높은 텐션, 경쟁상태에 놓였을 때의 긴장감 등을 굳이 느끼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냥 겁이 많거나 남과 싸우기 싫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자기 방어를 위해 주짓수를 배우는 것과, 승패를 겨루기 위해 완전히 낯선 사람과 매트 위에서 경기를 하는 건 다르니까 말이다.


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사실 나는 저 위에 적은 모든 것을 이유로 들어 주변의 시합 출전 권유를 피해왔다. 게다가, 우습게, 혹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차라리 치고받는 거라면 한번쯤 나설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라운드 기술 공방이 이어지는 주짓수를, 그것도 체육관 사람들이 아니라 아예 모르는 누군가와 경기를 치른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떤 격투기 경기를 상상해보아도, 내가 제압하는 그림은 떠오르지 않고 내가 제압당하는 상황만이 떠오르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맞는 것보다 깔리고 접히고 꺾이는 게 더 내키지 않았다. 


 얼마 전, 나의 이 약간 이상한 생각에 다행히 조금은 힘을 실어주는 유튜브 영상을 봤는데, 자신도 과거 킥복싱과 MMA 선수를 했었고, 그 옛날 K-1, PRIDE 시절부터 격투기 해설의 대체불가 선두주자였던 김대환 해설위원이 어떤 질문에 답하는 영상이었다. 그의 영상에는 예전부터 줄기차게 달렸던 댓글들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입식격투에서 월드클래스의 커리어를 이어간 선수가, 그보다 상대적으로 경력이 일천한 MMA 선수를 이길 수 있는가... 하는 류의 질문들이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 무려 아기 곰과 스파링을 하고!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는 길들여진 새끼곰이라고는 하지만 정말로 그 새끼곰과 아들을 레슬링을 시켰고 그 영상은 아직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결국 UFC에서 챔피언이 되고, 커리어 내내 한번도 지지 않고 은퇴한 다게스탄의 괴물 ‘하빕 누로마고메도프’가, 전성기의 ‘마이크 타이슨’과 싸우면, 누가 이기겠냐는 질문.


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50전 50승 무패라는 미친 커리어를 지닌, 여러 이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누구도 쉽게 부인할 수 없는, 역사상 최고의 복서, ‘플로이드 메이웨더’가 은퇴를 번복하고 다시 링에 오르면, 유도 올림피언 출신으로 UFC로 넘어와, UFC의 여성부 전체의 부흥을 이끈 챔피언 ‘론다 로우지’를 쉽게 이기지 않겠냐는 질문.


김대환 해설위원이 이런 류의 질문에 여러번 대답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질문의 가장 최신 버전이 또 댓글창을 시끄럽게 하자, 그는 각 잡고 진지하게 답변하기 위해 영상을 만든 것이다. 질문은 ‘UFC 여성부 밴텀, 페더 두 체급 챔피언에 올랐던 아만다 누네스가, 체격이 비슷한, 복싱을 1-2년 수련한 건장한 생활체육인 남성과 싸우면 당연히 남자가 이기지 않겠냐.’ 였다. 


김대환 해설위원의 답은, ‘이변은 없다. 둘의 체격이 비슷하다는 전제 하에, 그 둘이 같은 성별이건 다른 성별이건, 그라운드 초보자가 심지어 월드클래스의 MMA 선수를 상대로 MMA 룰로 경기를 하면 절대 이길 수 없다.’ 였다. 남녀간의 근력의 차이, 그간 해왔던 운동 경력 등 여러 가지를 종합해서 대답을 했지만, 또 다시 댓글창은 난리가 났다. 하지만 나는 그의 대답에 백퍼센트 동의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제로 스페인의 토마토 축제와 투우 축제를 거론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십수년 전 그 중 후자를 직접 경험했는데, 하루종일 정말 투우들과 난장을 펼치는 ‘산 페르민 축제’가 그것이다. 사람들과 투우가 한 공간에서 다 같이 도시 외곽에 있는 투우장까지 뛰어가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 축제는, 축제 내내 아침마다 그 짓을 하고, 같이 뛴, 아니 눈에 보이는 닥치는대로 사람을 자기 뿔로 치고 받고 질주하는 그 투우들을 결국은 투우장까지 끌고가서, 투우 경기에서 투우사가 그 투우를 제압하고, 그렇게 장렬하게 최후를 맞은 그 투우는 해체되어 투우장 밖 길거리 음식점에서 먹거리로 팔리는데, 고기가 얼마나 질긴지 마치 껌을 씹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무튼 그 축제에 관한 이야기는 이쯤 하고.. 진짜 할많하않. 


아무튼 그 축제가 시작되면, 팜플렛을 주는데, 편의시설의 위치, 각 행사의 시작 시간, 집결지 등과 함께, 주의사항들이 적혀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주의사항은 다음과 같다.


‘투우와 정면에서 마주쳐서 눈이 마주치면, 투우의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때,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려 엎드리세요.’


아멘. 

정말 옳으신 말씀. 머리와 장기를 보호해야지요. 아무리 투우의 뿔 끝을 잘라 뭉툭하게 만들고 고무 패킹까지 씌워놨다고 하지만, 배가 뚫리면 별 수 있겠습니까.


나도 몇 번을 그렇게 납작 엎드렸다. 

나는 축제 전날부터 축제 마지막날 새벽까지 노숙을 하며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뭔 소리냐면, 그러니까 질주해서 들이받는 것, 치고 받는 것, 몸에 충격이 가해지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인간은 어쨌든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대처하려 한다. 모르긴 몰라도, 수렵시대를 떠올려보면, 맹수들이 때리고 물고 달려드는 건 그려지니까. 


그런데 그라운드 기술은 그런 식으로 대처가 되지 않는다. 김대환 해설위원의 말마따나, 트라이앵글 초크의 다리 훅이 이미 걸려서, 점점 더 자기 목이 죄여올 때, 그걸 힘으로 뜯어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각 단계마다 상황마다 그에 따른 대처법이 있다. 하지만, 그걸 배우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그 대처법을 본능적으로 깨우칠 수가 없다. 그럼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이미 타격으로 끝장을 내버리면 되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다. 김대환 해설위원이 또 다른 예를 든다. 세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펀치와 그보다 더 경이로운 맷집을 자랑하던 괴물, 마크 헌트도, 레슬러 출신의 선수들이 손만 대면 넘어져 바닥을 굴렀다고 말이다. 


머리와 장기를 보호하는 자세로 단 한순간 틈을 노리다가 마음 먹고 달려들어 넘어뜨리면, 그 순간에 균형을 잡고 달려드는 상대의 가드를 부숴버리고 기절시킬 펀치나 킥을 낼 수 있는 타격가는 정말이지 흔치 않다. 


나는 이런 얘기를 왜 이렇게 길게 하고 있는 걸까. 

그러니까, 그냥 또 다른 이유를 하나 더 그럴듯하게 지껄이고 싶었던 게다. 

나는 주짓수 시합에 나가기 싫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비기너 대회에 나가지 않는다면, 비기너가 아닌 흰띠들과 하는 시합에 나가야 하고, 흰띠일 때 시합에 나가지 않으면, 블루벨트를 감고 다른 블루벨트들과 시합을 해야 돼. 언젠가 한 번, 꼭 경험을 해봐야 한다면, 지금 나가야 되는거야, 그게 그나마 제일 할만한 거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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