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몬 어드벤쳐 캐릭터가 그려진 실내화 주머니를 빙빙 돌리며 다녔던 초등학생 때를 떠올리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학교를 마치고 사먹던 100원 짜리 만두도, 복도에서 양말 슬라이딩을 하다가 발에 박혔던 나뭇가시도,
놀토 때 하교하면서 사먹었던 생얼음에 가까운 아이스크림도 생각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생각나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동그란 원에 그리던 방학 계획표다.
방학이 다와가면 선생님께서는 항상 동그란 원이 그려진 종이를 나눠주셨다. 그럼 나는 콧김을 훙훙 내뿜으며 24색 크레파스와 사인펜을 장전하고 24시간을 분 단위로 쪼갤 준비를 했다. 늘 영역 분배를 잘못해서 나중에는 간격이 엉망이 되었지만, 그래도 방학계획표를 참 재밌게 색칠했던 기억이 난다.
방학식을 마치고 집에 와서는 벽에 계획표를 붙여놓았는데, 바로 다음 날부터 계획을 지키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며 연필로 슬쩍슬쩍 시간을 고치다가 나중에는 벽에서 계획표를 아예 떼버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게 참 신났던 것 같다.
하루를 내맘대로 짤 수 있다는 것이,
‘이 때는 투니버스를 보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야지’ ‘그리고 이 때 잘거야’
내 마음대로 하루를 살 수 있다는 것이 기대되고 엄청난 자유처럼 느껴졌다.
금색 크레파스로 테두리를 색칠해가며 계획표를 그리던 나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동그란 생활계획표를 더이상 그리지 않게 되었다. 계획을 짜는 때는 친구들과 또는 혼자 여행을 갈 때 뿐, 열성적으로 동그라미를 채워나가던 나를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다시 생활계획표를 짜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은 유난히 힘들었던 한 주를 보낸 어느 날이었고, 정말로 주말이 간절했던 날이었다. 그런데 막상 금요일이 되자, ‘주말이 되면 뭐해? 약속도 없고 나 할 것도 없는데.’ 라는 생각이 들며 맥이 쫙 빠졌다.
누워서 할 일 없이 핸드폰만 보다가 주말은 언제나 그렇듯 순식간에 끝날거고, 또 다시 어김없이 해야할 일들이 가득한 한 주가 시작되겠지. 정말로 그 기분이 싫어서, ‘아냐, 나 정말 주말 잘 보내볼거야!’하는 오기가 생겼다.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으면 내일 일어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 같아서, 동그란 계획표를 다시 그려보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내가 채울 수 있는 파이가 커다랗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동그라미 안에 부채꼴을 그려넣어도 아직 더 채울 수 있는 공간이 더 많았다.
하루를 내 마음대로 채워넣는 건 신나는 일이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일들이 대부분 사소한 일들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그래도 나를 기분 좋게 하는 일들로만 채워진 하루를 사실 언제나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새로웠고 진작 이렇게 해볼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얇게 쪼개진 부채꼴 안에 좋아하는 일들을 채워넣었다. 남들이 보기에 좋은 일이 아니라 정말로 내가 편하고 좋아하는 일들로. 아침에 일어나서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또 날씨가 좋다면 운전해서 천장이 높은 카페에 가서 드라마를 다시 볼 수도 있다. 혼자여도 충분하고 같이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함께할 수도 있다.
갑자기 비행기로 편도 8시간 이상 걸리는 나라로 떠나거나 하는 계획은 갑자기 세울 수 없겠지만, 그래도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들로 내일을, 다가올 주말을 디자인하는 것은 오늘이라도 가능하다. 이렇게 말하면 매일 계획을 세우고 하루를 가열차고 행복하게 보내는 당장 일상 브이로그를 찍어도 될 프로계획쟁이같지만, 사실은 계획표 따위는 잊어버리고, 침대에 축 늘어져 무력감과 권태감을 느끼는 날이 더 많다.
하지만 언제든 좋아하는 일들로 가득찬 하루를 계획하고, 사소하지만 호사롭게도 그 하루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엄청나게 든든한 기분이 든다.
핸드폰 배터리가 다되어도 보조배터리가 가방에 있으면 배터리가 다 될 걸 알지만 데이터를 팡팡 쓰는 것처럼 우울한 날이 있더라도, 때로는 어떤 일에 대한 슬럼프가 유난히 오래 지속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하루를 스스로 만들 수 있고, 그 하루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시간을 버틸 수 있다.
나는 쉽게 행복해지고, 또 쉽게 마음이 무너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우울함의 티끌 하나 없이 행복한 마음만 있을 순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행복하고 우울하고 기쁘고 간절하고 뿌듯하며 절실하고 평온하기도 할 시간들 속에서도
나는 나의 하루정도는 내가 만들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이 하루들이 나를 나답게, 내가 오래 간직하고 싶은 마음가짐과 생각들을 이어가게 할 이음새가 될 거라는 것을 안다.
좋아하는 것을 잊지 않고, 그 행복 속을 살아갈 수 있는 하루를 만드는 것이 슬럼프매니아인 나를 살리고 나를 스스로 밝힐 수 있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