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어떤 일에도 의연하지 못하지만
사람의 마음과 상태를 설명하는 형용사 중 ‘의연하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언제 처음으로 이 단어를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의연하다’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나는 내가 모든 일에(모든 일이 어렵다면 대부분의 일에) 의연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의연함’이라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어른의 모습에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의연하다’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면 이렇다.
‘의연하다: 의지가 강하고 굳세어 끄떡없다.’
이 얼마나 홀로 주체적인 멋진 어른의 모습인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연함이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된 어린 나는 어른의 자질 리스트에 ‘의연함’을 1순위에 적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이 보이는 의연한 모습의 순간들도 좋았다. ‘시련도 그녀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그저 의연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라는 식의 문장과 이야기를 읽으면 ‘의연한 어른’이라는 목표의식이 +1 되었다.
‘그래, 어른이 되면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아야지. 지금은 작은 말들에도 마음이 쪼그라들고 걱정과 망설임의 순간들이 너무나도 많지만, 어른이 되면 씩씩하고 의연한 사람이 될 거야. 의연한 사람이 된다면 고민도 망설임도 시련도 나를 흔들 수 없을 거야.’ 이렇게 바라곤 했었다.
하지만 우리가 카페에서, 술을 마시며 친구들과 모이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와, 나는 근데 똑같아. 고등학생 때랑 마음이 똑같은 거 같아. 나중이 되어도 똑같을 거 같아.’ 그렇다, (나이 상) 어른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는다고 해서, 직장에 취업하고 사회생활을 한다고 해서 갑자기 뿅! 하고 어른이 되지 않는다. 갑자기 모든 일을 척척 잘 처리하고, 현명한 선택을 하고, 인간관계에 있어 상처 받지 않고 부드럽지만 카리스마 있게 말하고 행동하게 되지 않는다. 물론 사람은 모두 다르고,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습 또한 다면적이기 때문에 단정 지어 말할 순 없지만, Lv.20이 되면 아이템을 주는 게임 속 레벨 퀘스트처럼 일정 나이가 된다고 해서 ‘의연함’을 획득하게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이제는 충분히 어른으로 인정받는 나이이지만 여전히 ‘의연한 어른’을 꿈꿨던 그때처럼 나에게 불어오는 작은 바람에도 크게 흔들리기도 하고, 선택의 순간이 늘 어렵고 고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내 모습이 전혀 실망스럽지 않다.
그건 의연하다는 것은 항상 지속되는 영원불멸의 상태가 아니라, 주사위를 나오면 던지는 한 면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을 모습 중 하나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강철 무쇠처럼 매 순간, 모든 선택에 의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와 저 사람은 진짜 멋진 찐 어른이다. 모든 선택도 결단력 있게 해낼 거야.’하는 사람에게도 고민이 되는 순간이 있을 것이고, 매번 고민하고 망설이고 걱정하는 사람에게도 의연하게 결정하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날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아직도 나는 대부분의 순간에 의연하지 못하고, 허둥거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의연한 어른이 되고 싶고 그 모습에 가까워지고 싶어 노력하고 있다. 매번 의연할 수는 없지만 때로는 의연하게 선택하고 결정하고 견딜 줄 아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아직은 어떤 일에도 의연하지 못하다고 느끼지만 그래도 지금은 나의 여러 모습들 중 의연함을 키워가는 과정 중이라고 믿는다. 언젠가 오늘과 비슷한 내일의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조금 덜 흔들리고, 여유 있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도록 말이다.
본문 커버 사진: unsplash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