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가 되어 자주 떠오르는 문장

침전물이 제거된 맑은 물이 머릿속에서 방울방울 떨어진다.

by 이아
그는 긴긴 시간을 꼼짝 않고 보낸다.
침전물이 제거된 맑은 물이
머릿속에서 방울방울 떨어진다.

그는 헛간을 말끔히 치웠지만,
밟아 다져진 흙바닥의
이 너른 공간을
개조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

이 공간의 유일한 기능은
바로 아무 데도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용無用과 무사無償의 호사.
공허에 바쳐진 신전.

문 가까이 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마그누스는 이곳에 들어오면
그 의자 등받이를 잡아
헛간 한복판이나 한쪽 벽
혹은 구석에 옮겨놓는다.

그런 다음 거기 앉아
무릎 사이에 세워둔 지팡이에
손을 올려둔 채
몇 시간이고 머무른다.

침묵을 음미하며,
벌어진 벽 판자 사이로
새어드는 빛과 그림자놀이를 즐기며,
아니면 빛줄기 속에서
선회하는 미세한 먼지나
구석진 곳에 걸린 거미줄을 관찰하면서.

들쥐 한 마리가 지나가기도 하는데,
녀석은 잽싸게 다가오다
냄새를 맡고는
방향을 바꿔
다른 곳으로 달아난다.

새들도 합세해
무無의 제단에서
모험을 벌이거나
때로는 자신들의 둥지를 짓기도 한다.

헛간에서 나올 때면
그는 어김없이 의자를
문가에 도로 갖다 둔다.


From. 마그누스 - 실비 제르맹


실비 제르맹 작가님의 여러 작품 중, 원픽은 마그누스입니다. 오늘은 이 문장들을 음미하고 싶어서 올립니다.


침전물이 제거된 맑은 물이 머릿속에서 방울방울 떨어진다,

는 표현이 너무 좋았어서 여기저기에 써두고, 외워버렸던 것 같습니다.


머리가 뿌옇고, 혼탁하고, 몸이 무겁고, 무기력한 상태에서 이런 상태를 꿈꿨던 것 같네요. 이런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무용無用과 무사無償의 호사를 충분히 누려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은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분명히 필요합니다. 너무 빨리 돌아가는 세상, 눈 뜨면 바뀌어 버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살기 위해서는 더 눈에 힘을 주고, 더 빠르게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해보는 것이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침묵을 음미하는 시간은, 함께 어울리고 나누는 시간만큼 값지고,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인 것 같습니다.


문 가까이 놓인 의자를 헛간 한복판 또는 한쪽 벽, 구석으로 옮기고, 무릎 사이에 세워둔 지팡이에 손을 올려둔 채로 하염없이 앉아서 머무르는 마그누스의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자주 떠오르는 이미지입니다. 그리하여, 그 마그누스는 제가 되기도 합니다.


모든 기억이 감미롭게 녹아내립니다. 좋았던 기억도, 힘들었던 기억도 부드럽게 풀어집니다. 그리고 저는 헛간에서 나올 때 어김없이 의자를 문가로 도로 갖다 놓습니다.


꽤 여러 차례 읽다 보니 제 자신이 마그누스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실비 제르맹 작가님께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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