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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락 그 진실의 순간

이제 겨우 18세잖아

by 화문화답

대한은행


다른 학교에서도 어떤 학생이 대한은행에 합격하면 교문 앞에 커다란 현수막을 걸어 준다고 한다.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취업반에서 비교적 취업 역량이 우수한 두 학생이 나섰지만, 한 명은 필기시험에서, 또 한 명은 면접에서 떨어졌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서울 소재 ○○여상 학생들이 대거 합격했다고 한다. 역시 현실은 냉혹하다.


학교와 교무실이 유별난 고요에 묻혀있던 어느 날, 두 학생이 나를 찾아왔다. 상담실에서 마주 앉은 그들은 대한은행에 지원하고 싶은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아이고, 괜찮고말고가 어디 있어. 해당 채용 정보를 공지하고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빠른 반응에 내심 놀랐다.


'도전적 취업'을 권장하는 나에게, 일부 담임교사들은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어차피 되지도 않을 게 뻔한데 희망 고문이며 좌절감만 얹어줄 거라는 이유이다. 이런 상황에서 해보겠다는 학생이 두 명씩이나 나타나다니, 내 전략이 먹힌 것이다.


내신 등급을 산출하고 학교장 추천서를 받은 다음,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데 여기서 첫 번째 난관에 부딪혔다. 직무와 관련된 경험 활동 자체가 부족하니까 적절한 스토리 소재를 찾아내기가 막막했다. 질문하는 의도에 맞게 답변을 서술하는 것도 매우 서툴렀다.


사실, '대한은행 직원으로서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를 명시하고 이를 위해 본인이 갖춘 역량이 무엇인지 직무경험, 학업수행 경험 등을 바탕으로 기술하시오.' 이런 문항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학생들이 갖추어 쓰기가 쉽지는 않다. 그것도 300자 이내로.


본인들이 써 온 초안을 바탕으로 수차례 피드백을 해주었지만, 완성도가 올라오지 않았다. 그대로 제출하면 자소서에서 탈락할 확률이 높다. 그렇지만 이럴 때일수록 호흡을 조절해야 한다. 너무 재촉하거나 밀어붙이지 않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첨삭 지도를 해주었다.


온라인 입사지원을 마치고는 일부러 머릿속에서 서류 전형 발표 날짜를 지워버렸다. 이미 던져진 돌인데 자꾸 거기에 신경이 쓰여 다른 일에 집중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렇게 두 주가 지난 어느 날, 1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었다.


'선생님, 합격했어요!' 하는 합창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두 학생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녀석들, 이제 겨우 서류 전형 통과한 것인데 벌써 입꼬리가 귀에 걸려있다. 서류 전형조차 될 리가 없다며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고 했다. 본인들 표현대로 '신박한 경험'을 한 것이다.


대한은행 필기시험은 어렵기로 악명이 높다. 대한은행에 지원하려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인제 와서 지난 시간을 탓하면 뭐 하겠는가. 원서 접수와 동시에 서류 합격을 가정하고 필기 준비를 시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출문제 양(量)치기'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루에 단 1%씩이라도 합격 확률을 높여가는 게임을 해야 한다.


필기시험이 끝나고 소감을 물었더니 둘 다 울상이다. 시간이 부족했다며 자포자기 상태였다. 그래, 그게 쉬울 리가 있겠니? 결과적으로 한 명은 붙었고 한 명은 떨어졌다. 모름지기 그 차이는 달랑 한두 문제였으리라. 필기 합격자 한 명으로도 교무실이 들썩들썩했다. 지금까지 이 학교에서 대한은행에 면접까지 가 본 사례가 처음이라고 했다.


면접은 1차 실무 면접, 2차 임원 면접이었다. 학교의 지원으로 취업부장은 외부 강사를 불러다 개별 지도를 진행했다. 그야말로 특별 대우이다. 그 개별 지도가 어떤 것일까 궁금했는데, 들어 보니 여러 개의 예상 질문을 뽑아주는 정도였다. 그리고 이래야 한다. 또는 이러면 안 된다는 일반적이고 일방적인 대화, 그게 다였다.


채빈이 어떤 성향의 학생인지 잘 아는 나로서는 불안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끝까지 함께 해주지 못하면 나중에 미련이 남을 것 같았다. 외부 강사의 개별 지도 3회 차가 끝난 후, 취업부장에게 내가 인벌브하겠다고 자청하여 승인을 받았다.


먼저 대한은행의 개요와 경제 및 금융 관련 최근 이슈를 매일 한 건씩 정리하도록 했다. 다음으로 예상 질문 20개를 뽑아 답변 스크립트와 키워드를 작성했고, 이어서 마인드, 이미지메이킹, 스피치 같은 면접 기술을 가르쳤다. 롤플레잉(role playing)과 영상 촬영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고, 개선이 필요한 사항을 발견하여 수정하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취업부 선생님들을 모셔 놓고 모의 면접을 진행했다.


말이 쉽지 여기까지만 해도 낯설고 힘든 과정이다. 의지가 약한 학생은 중도에 포기하거나 울고불고하는 예도 있다. 하지만 채빈은 다행히도 잘 따라왔다. 아쉽게도, 경직된 표정과 자신감이 부족한 태도, 너무 겸손하고 착한 이미지는 단시간 내에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면접 보는 날, 내가 면접장까지 동행했다. 한 시간쯤 일찍 도착해서 면접 장소를 확인한 다음, 근처 카페에 가서 따뜻한 음료 한 잔을 마시게 하고 면접장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나는 그 카페에서 기다렸다.


채빈이가 어떤 얼굴로 나타날지 궁금했다. 두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살짝 상기되기는 했지만 들어갈 때와 얼추 비슷한 얼굴로 돌아왔다. 한마디로 무난했다고 자평했다. 무난이라. 좋게 해석하면 큰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겠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특별히 어필할 기회가 없었다는 뜻이다. 어쨌든 무사히 마쳤다니 우선은 다행이다.


근처의 맛집으로 유명한 나○ 곰탕으로 데려가서 늦은 점심을 사주었다. 곰탕을 처음 먹어 보는데 맛있다면서 잘 먹었다. 면접 때문에 제주 가족 여행에 합류하지 못했다면서 이제 좀 놀아야겠다고 즐거워한다. 읽을 책 한 권을 추천해 달라고 해서 이서윤 님의 더 해빙을 추천해 주었다. 근데 이 친구는 지금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걸까? 이제 합격 발표만 남았다고 확신하는 건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잔소리를 삼켰다.


그리고 떨어졌다. 면접보다는 그전에 온라인 인적성 검사가 마음에 걸렸다. 검사 도중에 이대로 답을 계속하면 탈락하게 된다는 메시지가 두 번이나 떴다고 했다. 일관성 체크에 걸렸든지 아니면 대한은행에 부합하는 성격이 아니라고 판정되었을 것이다. '차돌같이 단단한 관료적 이미지'가 대한은행이 원하는 인재상이다. 채빈은 이런 이미지와는 살짝 다른 부분이 있었다. 면접관들은 현장에서 판단하기도 하지만 인적성 검사 결과를 참조하기도 한다.


탈락으로 결론이 났지만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싶다. 이 모든 것이 성인이 되고 사회인이 되어가는 과정이고 성장통이다. 아쉽겠지만 하루빨리 털어 버리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면 된다. 이제 겨우 18살이다. 취업이라는 것은 내가 아무리 잘났어도 해당 기업하고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떨어지기도 한다. 그때마다 좌절할 필요는 없다.



두리은행


그래도 대한은행 면접은 비교적 일반적인 형태이다. 하지만 두리은행은 문화적합성 면접과 토론/협상 면접이다. 사실 면접의 형태는 워낙 다양하고 변화무쌍하다. 그래서 모든 대비를 완벽하게 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두리은행 면접은 그 용어 만으로도 부담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두리은행에 지원한 은정이는 수학을 잘하는 편이어서 직업기초능력 시험을 보는데 오히려 시간이 남았다고 한다. 그러더니 서류 전형 통과에 이어 필기시험에 떡하니 붙었다. 이 학생의 성격과 이미지가 은행원과는 잘 맞지 않는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바로 면접 준비를 시작했다.


문화적합성 면접은 두리은행의 인재상이나 비전 등에 토대한 경험 사항들을 뽑아내어 답변을 준비하도록 했다. 토론/협상면접은 협상면접 기출과 예상 문제를 입수하여 연습시켰다. 대한은행 같은 경우에는 학교 차원에서 외부 강사 개인지도 같은 지원이 있었지만, 두리은행은 없었다.


그렇게까지(?) 해주었는데도 면접에 불합격한 채빈이 학습효과 때문 아니었을까? 자연스럽게 은정은 처음부터 내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방학 기간 중으로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매일 학교에 나오도록 해서 대화법과 토론 기술을 가르쳤다.


그러나 문제는 은정이 잘 따라오지 않았다. 예를 들어, 소리 내어 말해 보라면 쑥스럽다며 자신은 실전에 강하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고 강압적으로 할 수는 없고, 한 가지 궁여지책을 생각해 냈다. 경쟁자인 다른 지원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 그러면 혹시 자극을 받을지도 모른다.


취업지원관 단톡방에 수소문한 결과 바로 인근 학교에 두리은행 면접 예정자가 있었다. 경쟁자이지만 두 학생을 만나게 하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은정은 그 학생을 보고 배울 것이 있을 것이고, 그 학생은 토의면접에 대해 내가 코칭해 주는 내용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취업부장의 승인을 받고 날을 잡아 은정이를 데리고 그 학교로 갔다. 그쪽 학생은 척 보기에도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에 표정까지, 딱 은행원 타입이었다. 학생, 자기소개 한번 해 보세요. 앉자마자 의도적으로 자기소개를 시켰다. 달달 외운 티가 나고 과한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전혀 주눅이 들지 않는 강점이 있었다. '이 학생은 합격하겠다'는 직감이 왔다. 나중에 알았지만 내 생각이 적중했다.


같은 은행이라도 대한은행이 밤톨같이 단단한 엘리트 이미지를 원한다면, 두리은행은 밝고 외향적인 성격의 영업을 잘할 것 같은 직원을 뽑는다. 너무나 당연하다. 은행의 업무는 창구에서도, 지점장이 하는 일도 영업이 본질이다.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마인드와 태도, 성격이 갖추어져야 합격할 수 있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며 낯을 가리기까지 한다면 인성검사나 면접에서 걸러질 확률이 높다.


"어땠어?"

"그냥 열심히 했는데 모르겠어요."


그렇게 은정의 면접이 끝났다. 단답형으로 대답하지 말라고 가르쳤건만 여전히 단답형이다. 다행히 이 학생은 직업기초능력 시험에 강하다. 은행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성격에 맞는 다른 직무에 도전하면 분명 새로운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얼른 잊어버리고 다시 준비해 보자고 했더니 이 친구가 새침한 얼굴로 대답한다.


"선생님, 저 벌써 다 잊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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