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벗 중에 꽃을 유난히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 꽃을 좋아하는 아내랑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 친구는 주말이 되면 아이들과 함께 집 근처의 호수공원을 갔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큰 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펼쳤다. 엄마, 아빠는 책을 읽고, 아이들은 잔디밭에서 나비를 쫓아다녔다. 어느 순간 아이들도 책을 읽기 시작했고, 지나가는 구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점심시간에는 아내가 준비해온 맛있는 도시락을 먹었다. 아내의 수고가 항상 마음에 걸렸단다. 아내에게 식당을 이용하자고 설득했지만, 꼬박꼬박 새벽에 일어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도시락을 열면 흰색의 쌀밥 위에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작은 콩알이 점선으로 연결되어 사랑, 감사라는 단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친구의 아이들은 학원 하나 다지지 않았지만 훌륭하게 성장하였다. 지금은 국내 최고의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받고 있다고 한다. 하루는 외국 여행 중이던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보이는 노을이 너무 아름다운데, 엄마 아빠와 어린 시절에 보냈던 호수가 생각났다고 했다. 그 호수공원에서 보았던 석양 모습과 비슷하다고 했다.
그 친구는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따뜻한 감성을 지닌 아이들로 성장해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공부도 잘하고, 거기에 풍부한 감성까지 갖추었으니 앞으로 밥 먹지 말라고 친구에게 말해 주었다. 나이가 들수록 바르게 성장해 가는 자식을 보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라는 옛 어른들의 이야기를 그 친구를 통해서 실감할 수 있었다. 따뜻한 감성을 지닌 아이들을 둔 내 친구가 참 부럽다.
‘감성’이라는 말이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 ‘디지털 시대 이성보다 감성이 충족되어야 한다.’, ‘감성을 자극하라. 코끼리도 다룰 수 있다.’, ‘감정을 사고파는 감성 마케팅’ 등이라는 문장이 SNS에 넘쳐난다. 감성을 사전에서는 어떤 일이나 현상, 사물에 대하여 느낌이 일어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감정이 어떤 일에 대하여 습관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이라면 감성은 감정을 보다 적극적으로 다루는 능력이다.
조금 더 감성을 쉽게 생각해 보자. 집을 지으려면 고운 모래가 필요하다. 고운 모래와 시멘트를 섞으면 벽돌을 만들 수 있다. 이 고운 모래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고운 모래는 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 바다, 냇가에서 채취해온 거친 모래를 채에 던지면, 자갈과 고운 모래를 서로 분리할 수 있다. 거친 모래가 감정이라면, 채로 걸러진 고운 모래가 감성이다.
감성이 높은 사람은 감정, 느낌을 긍정적으로 잘 다룬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지금 벌어지는 상황에 대하여 발생하는 감정을 긍정적, 심미적으로 잘 처리한다. 감성이 높은 사람은 화라는 감정을 용서로 표현하며, 실망이라는 감정 대신에 용기를 심어준다. 이런 높은 감성을 지닌 사람이 인정받는 사회가 되었다. 감성이 실력이다.
내 친구 아이들이 그렇다. 높은 감성을 지닌 아이들이다. 초․중․고를 다니면서 싸움 한번 없었단다. 친구 아내에게 질문을 했다. “사춘기는 어떻게 하셨어요.”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사춘기요. 잘 모르겠어요. 딱히 사춘기라 할 만한 그런 일이 없었어요.” 감성이 높은 아이들은 누구나 겪는 사춘기도 겪지 않는다고 한다.
요즘 아이들의 생각과 감정이 거칠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이유로 매일 학교에서는 왕따, 학교 폭력 등이 일어난다. 이제 거친 생각과 감정을 감성으로 바꾸어주어야 한다. 감성 교육을 위해서는 ‘채’가 필요하다. 그런데 학교에서 ‘채’가 보이지 않는다. 감성에 대한 논의조차 없다. 내 친구의 자녀와 같은 아이들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채’가 필요하다. 그 ‘채’가 무엇일까? 어떻게 그 ‘채’를 만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