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립의 위하여
두 달 전, 조카에게 하루 계획표를 써오라고 하면 "오전 7시에서 9시 사이에 일어나서 씻은 후, 오전 중 운동하고 점심 먹고 오후부터 드라마 보고 저녁에 롤 하고 놀고 언제 잘지는 모르겠음"으로 해석될 만한 엉성한 계획표를 가져왔다.
장기 계획은 더 엉망이었다. 조카에게 취업이 안 되면 어떻게 할지 계획이 있냐고 물으니 친한 형과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단다. 공무원 시험을 왜 준비하려 하는지 물으니 취업에는 일정 조건의 스펙이 필요하지만 공무원 시험은 자격기준이나 제한이 없어서란다.
어이가 없었다. 초·중·고등학교 12년을 무난히 따라온 사람들이 대학교 4년을 역시 무난히 따라가고, 그 사람들 중 하루 12시간 이상 1년 정도 공부한 사람들이 50대 1에서 100대 1 정도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는 게 공무원 시험이라 설명했다. 일정 스펙을 갖춰서 사회복지시설에 취업하는 것과 아무 조건 없이 누구나 치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울까?
취업이 안 되니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겠다는 건, 평생 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네가 삼촌과 공부로 경쟁해 보겠다는 것이다. 정말 마음 단단히 먹고 하루 16시간 이상씩 몇 년 공부해보겠다면 모르지만, 이 길이 더 쉬울 것 같아서라면 착각이다. 네 계획은 조기축구 동호회에서 뛰던 사람이 실력이 턱없이 안 되어 실업축구단 입단 테스트에서 탈락했는데, 오히려 프로 리그에 도전하겠다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계획은 내 능력을 가늠해서 현실적으로 현재 이룰 수 있는 방향으로 짜야하며, 목표를 높게 설정하려면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내 능력을 쌓는 과정까지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조카의 계획이라는 건 이렇게 하나같이 현실성 없는 엉성한 것들이었다.
조카를 독립시키겠다고 선언한 후 걱정이 많았지만, 오히려 내가 시킨 것을 잘 따르며 바른생활을 하는 점에 조금 안도했다. 얼마 후 조카가 기분이 좋다며 자기 노트북을 보여줬다. 녀석은 4점대 학점을 받아서 신나 있었다. 학점이 이렇게 잘 나올지 몰랐다며 만약 취업이 잘 안 된다면, 플랜 B로 4년제 대학교로 편입해서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런 작은 성취가 중요하다고, 다음 학기는 더 성적을 높여보라고 했다.
편입에 긍정적이라고도 했다. 코로나로 인해 대학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것도 아쉽고 취업이 되면 할 수 있는 활동이 제한적이라, 네가 공부를 2년 더 하면서 대학을 경험해 보는 것에 찬성한다고 했다. 대학이라는 사회진출의 준비단계 동안 새로운 아르바이트나 국제 페스티벌 같은 여러 행사의 자원활동도 경험하고 여행도 다니는 것이 너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해 줄 거라고 했다.
최근엔 조카가 사회복지협회에 일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전까지는 아이들을 돌보는 걸 좋아해서 보육원에 일하고 싶어 했던 터라 왜 마음이 바뀌었는지 궁금했다. 현실적으로 협회가 보수 등 조건이 더 좋은 것도 있지만, 보육원을 지원하는 각종 사업을 집행할 수 있는 점이 끌린다고 말했다. 단지 생존을 위해 취업만을 목표로 하던 녀석이 업종 내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발전적이었다. 녀석에게 그렇게 일하며 경험을 쌓다가 뜻이 생기면 국제구호단체에 취업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저개발국가에서 우물을 파주는 일을 상상하며 녀석과 웃었다.
얼마 전엔 조카가 나에게 LH에서 하는 ‘보호종료아동 전세임대주택’이라는 걸 보여줬다. 이걸로 하면 삼촌에게 보증금 부담을 안 주고 자신도 월세 부담이 없을 것 같다고 확인해 달라고 했다.
조카의 말대로였다. 광역시를 기준으론 9,500만 원 한도 내의 계약에 전세자금이 지원되는데 연 이자가 1~2%밖에 되지 않고 보호종료 후 5년 이내에는 이자도 50% 감면이라 9,400만 원 전세자금 지원을 받을 경우(임대료 100만 원은 본인 부담) 앞으로 4년간 전세보증금의 연 1% 이자인 월 8만 원 정도만 부담하면 되었다.
어떻게 이런 걸 알았는지 물었더니 스스로 인터넷에서 열심히 찾았다고 했다. 사회복지사 선생님들도 알고 계시던지 물었더니,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런 좋은 정보는 잘 기억했다가 나중에 시설을 퇴소하는 네 동생들에게도 알려주라고 했다.
요즘 조카는 인터넷으로 이곳저곳 방을 보며 나한테 계속 묻는다. 그러면 나는 교통의 이점, 내부 시설, 관리비 등을 따져가며 설명해준다. 현실성 있는 계획들이 세워지니, 녀석에게 미래에 대한 두려움보다 자립을 향한 설렘이 가득 차 보인다.
https://www.myhome.go.kr/hws/portal/cont/selectHouseSupView.do#guide=MENU003
조카에게 말했다. 너는 “뽑기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누군가는 뽑기 운이 좋아서 재벌집 아들로 태어났고 삼촌은 뽑기 운이 평범해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너는 뽑기 운이 없어서 책임감 없는 사람들에게서 태어나 시설에 맡겨진 거라고. 하지만 그건 우리의 선택이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니 이제 와서 원망하고 연연하지 말자고. 그래도 너에게는 두 번째 뽑기 운이 나쁘지 않아 삼촌이란 후원자를 만났지 않느냐고.
나는 너의 성공을 바라지는 않는다고도 했다. 그냥 네가 남들처럼 소소하고 평범한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다고. 가정을 꾸리고 너를 버린 사람들과 다르게 책임감 있는 남편과 아버지가 되고 내 집 마련의 기쁨도 누렸으면 좋겠다고. 내가 모르는 보호종료아동의 어려움을 너는 잘 알 것이니, 시설에 있는 동생·조카들도 챙겨서 사회에 잘 정착시켜 보자고. 그리고 네가 열심히 살아간다면 삼촌이 곁에서 계속 돕겠다고.
원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이왕 태어난 거 제대로 한 번 살아보자고 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는 원치 않는 아이라고 아무도 기뻐하지 않았겠지만, 떠나갈 때는 모두가 너를 위해 슬퍼하고 떠난 너를 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그리워하는 그런 삶을 살자고 했다.
조카는 이제 내가 알려주지 않은 것도 스스로 잘 찾아내서 준비한다. 그리고 자신이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대충 알아서 잘 되겠지’라고 하지 않고 더 찾아보고, 모르는 것은 나에게 물어보고 상의한다. 요즘은 조카를 보면 나의 스물한 살과 비교돼서, 오히려 내가 부끄럽고 녀석이 대견하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언제 이렇게 다 큰 듬직한 아들을 얻었나 싶다.
2021년. 이제 겨우 스물 한 살인 청년. 동정심과 변명으로 현실을 회피했던 아이는, 보호종료아동이란 딱지를 떼고 사회인이자 청년으로 성장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누군가를 원망하기보다 우리 행복한 삶을 살자. 두려움 없이 세상으로 나아가자. 김 조카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