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농사 문화 속 함께 일하기

벼농사 vs 밀농사, 공간이 만든 공간, 쌀 재난 국가

by 최기형

작년과 올해 인상 깊게 읽은 책 2권이 공교롭게 같은 시작점에서 출발하는데요. 바로 토마스 탈헬름(Thomas Talhelm) 교수의 논문 ‘벼농사와 밀농사에 따른 문화적 차이의 증거’입니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 건축가와 사회학자가 어떻게 자신의 관점을 넓혀가는지 흥미롭게 비교해볼 수 있더라고요. 단순한 비교를 넘어 지금 우리 세대의 불평등은 왜 발생하는지, 직장 내 세대갈등 등을 조금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밀농사 vs 벼농사

일반적으로 1년에 1,000mm 이상 비가 내리면 ‘벼’, 그보다 적으면 ‘밀’ 재배한다고 합니다. 보통 동아시아지역이 강수량이 많아 벼농사가 많고요. 탈헬름 교수의 연구로는 밀농사는 혼자서 씨 뿌리고 수확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에 개인주의 성향을, 벼농사 지역은 자연환경(강수량) 영향을 많이 받고, 공동 생산을 하기 때문에 집단주의 성향을 보인다고 합니다.


토마스 탈헬름(Thomas Talhelm) 교수의 논문 ‘벼농사와 밀농사에 따른 문화적 차이의 증거’


이해하기 편하게 동서양으로 구분하기는 했지만, 실제 연구에서는 중국 대륙 중/남부(벼농사), 북부(밀농사) 지역 한족을 대상으로 ‘기차, 버스, 철길’ 세 가지 중 같은 종류를 묶는 문제를 냈다고 해요. 밀농사-개인주의 성향에서는 ‘객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기차와 버스를 하나로 묶고, 벼농사-집단주의 성향에서는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기차-철길’을 묶는 비율이 높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크기를 원으로 표현해 보라는 질문에 벼농사 지역이 밀농사 지역에 비해 동그라미를 작게 그렸으며, 이 부분이 ‘나’보다 ‘우리’라는 집단을 우선시하는 성향이 반영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작년에 인상 깊게 본 유튜브 영상인데, 같은 맥락 속에 있네요. 펜실베이니아주립대 샘 리처드 교수의 동서양 문화에 대한 토론 : https://www.youtube.com/watch?v=G-OMvE_B0E8 )



건축가의 시선 : 강수량이 가른 동서양 건축과 문화적 차이

유현준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강수량’이라는 Index가 동서양 건축/문화에 차이를 가져온 부분을 설명합니다.


1) 유럽(밀농사 지역)은 ‘벽’ 중심의 공간

단단한 땅 위에 벽돌로 벽을 세우고 그 위에 평평한 지붕을 올림.

근대에 콘크리트가 확산되기 전까지, 벽은 집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힘)이었기 때문에 벽 중간에 구멍 내서 창을 만들기 어려움. 매우 작은 창을 만들게 되며, 안에서 밖을 보는 게 중요하지 않은 성격이 됨

그래서 밖에서 건물을 바라보는 시점을 더 중요시해서 외부 디자인적 요소가 강조되고 각종 조각품으로 건물을 꾸미는 경우가 많음


2) 동양(벼농사 지역)은 ‘기둥’ 중심의 공간

벽돌로 집을 지었다가 집중호우 맞으면 전체가 무너질 수 있음. 그래서 단단한 주춧돌(목재가 물에 젖지 않게) 위에 가벼운 목재를 올리고 지붕의 처마를 길게 내어 비가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함(목재가 젖지 않게).

기둥으로 구분되기 때문에 내외부 경계가 모호하고, 기둥과 기둥 사이는 거대한 창이 되어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풍경을 중시하게 됨. 집의 내부/바깥 경치의 관계가 중요한 요소


사회학자의 시선 : 벼농사 문화에서 비롯된 우리 사회 불평등

이철승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탈헬름 교수와 공동 연구를 통해 우리 사회 불평등의 배경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철승 교수가 말하는 벼농사 문화의 특징은,


1) 협업 네트워크 → 협동과 경쟁의 반복/강화 → 신뢰와 불신이 공존하는 ‘협력과 경쟁의 이중주’

결과적으로 공동체의 유대감과 더불어 비교와 질시의 문화를 갖게 됨. 서구에서 정의한 ‘집단주의’라는 명칭보다 훨씬 더 복잡한 관계

밀농사 문화 속 행복의 근원은 독립된 개인의 내면 충만감. 생산과 수확은 신과의 계약으로 내가 뿌린 만큼 거두었다는 생각을 함

그러나 벼농사 체제의 성공이란 나의 노력 + 협업 네트워크의 노력 + 관계 속의 평판/인성의 결과물. 결국, 관계적 행복이자 타인과의 비교가 깔려 있음

2) 재난을 대비하는 구휼 국가

재난 상황에 대처하는 리더십에 민감함. 재난이 발생하면 ‘우리 논’을 살리기 위해 국가/왕/리더십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임

3) 표준화와 평준화. 수직/수평의 기술 튜닝

함께 농사를 지으려면 기법/방식을 동일하게(표준화), 생산성을 동일하게(평준화) 해야 더 많이 수확을 하고 불만이 생기지 않음.

서로에 대한 간섭과 규율을 통해 수직(부모-자식 간), 수평(또래 세대 간) 조율/훈육이 자연스러움


4) 나이/위계에 따른 서열문화와 연공제 위주의 노동 시장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을수록 농사를 잘 지음. 장마/가뭄에 대한 대비, 모내기/저수지 관리 등에 대한 지식과 경험 자체가 큰 기술이자 자산


이러한 특성을 결합하면 K-방역, 동아시아 국가 발전 모델, 세대 간 갈등 등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협력과 경쟁의 이중주 + 2) 재난을 대비하는 구휼 국가
: 코로나 시대에 동아시아 방역체계가 왜 성공했는지 알 수 있음. 사회적 조율/감시 통해서 마스크가 필수화 되고, 재난을 잘 통제해야만 리더십에 대한 믿음이 높아져 하나의 방향으로 뭉칠 수 있음.(실제 쌀 생산 국가에서 확진자수가 적다는 유의미한 통계 존재하고 중국 내 벼농사 지역이 밀농사 지역에 비해 확진자 수 적다고 함)

1) 협력과 경쟁의 이중주 + 3) 표준화와 평준화
: 동아시아 국가/기업의 경제 성장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음. 창의성은 약하지만, 한 가지 Target이 정해지면 협업+표준화+평준화를 통해 빠르고 효율적으로 구축/발전함

1) 협력과 경쟁의 이중주 + 4) 나이/위계에 따른 서열문화
: 직장 내, 그리고 사회 전반에 퍼진 세대 간 갈등을 이해할 수 있음. ‘벼농사 체제에서 비롯된 집단주의를 몸에 익힌 세대’ vs ‘세계화에 따른 개인주의 문화의 확산으로 집단주의가 탈색된 젊은 세대’ 간 서로의 기대, 성공/수확량을 결정짓는 공식이 다름. 특히, 이른바 MZ 세대는 연공제의 원리에 동의하지 않음
→ 연공제가 비교와 질시 문화를 억제하는 기능을 하는데, 이것이 작동하지 않으면 공정성 시비를 일으킴. “왜 일한 만큼 보상하지 않고 일하지 않은 자에게 보상하느냐”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연공제, 그리고 갈등

이철승 교수가 말하는 해결책은 ‘연공제 대신 숙련 보상 시스템을 도입하자’입니다.

저성장 시대에 호봉제는 다 같이 누릴 수 없는 불합리한 제도 → 비정규직과 청년세대의 희생으로 지금까지 유지함 → 호봉제 폐지 → 정년에 가까울수록 급여를 낮추고, 그만큼 남은 비용으로 신규 채용을 늘리자
(최초 입사 노동자의 30년 후 임금 배율이 서유럽 1.7배, 일본 2.5배인 반면 한국이 3.3배. 연공제는 전 세계에서 한국밖에 안 함)

엄격한 직무 평가 도입, 직무 단위 급여 부여(동일 작업장 & 동일 역할 = 동일 임금 but 힘든 일 하면 더 많은 보상) 등


이른바 MZ세대라 불리는 저 연차 구성원의 새로운 요구에 대해 많은 기업들이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데요. 무늬만 직무평가를 도입해서 오히려 더 반발을 일으키기도 하고, '일 안 하면서 돈은 많이 버는 부장님은 도저히 못 보겠다'라며 퇴사하는 직원을 잡지 못해 고령화 조직 문제를 계속 안고 가기도 하고요. 저렇게 바뀌게 되면, 누군가의 삶이 더 좋아지는 대신 누군가는 지금 누리는 여유를 조금 내려놓아야 하죠. '돈'='쌀'의 관점으로 볼 때 쉽지 않은 문제이지만 다 함께 생각해볼 만한 주제인 것 같습니다.


참고도서>
공간이 만든 공간, 유현준
쌀 재난 국가, 이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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