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명에서 감각으로
20대
첫 회사인 사회적 기업에서 고군분투하던 어느 날,
나와 정반대 성향을 가진 친구가 말했다.
“너 같은 사람이 있어야 세상도 변하지.”
의외의 위로가 내게는 훈장처럼 남았다.
나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고
이제는 정리 또한 그 변화를 만드는 도구였다.
곤도 마리에의 철학은 정리를 기술이 아닌
삶의 태도로 사는 법을 알려주었다.
물건을 남길지 비울 지를 결정하며
“지금 내 몸이 어떤가?”라는 질문으로
나 자신과 소통하는 법을 처음으로 체감했다.
실제로 만난 곤도마리에는 작은 체구지만,
묘하게 집중된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나와 나이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데도
이미 10여 년 전 일본보다 미국에서
더 자신의 철학을 알린 존재였다.
동경의 대상이었던 그 이름의 무게를 알기에
책임감을 가지며 꽤 진지하게 그 철학대로 살아보았다.
하지만 그 진심을 전달하려 애쓸수록,
정리는 점점 설명과 설득의 일이 되어갔다.
가장 중요한 설렘은 멀어져 갔다.
이 설렘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알고 싶어
뇌과학자에게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답은 못 받았지만,
대신 <내면소통>이라는 책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이제는 굳이 외부에서 확인받고 싶은
마음이 잦아들었다.
이해가 충분해지자 지적 호기심은 조용해졌고,
대신 내 감각에 대한 단단한 확신이 남았다.
그래서 하나의 큰 결정을 내렸다.
곤도마리에 미국 인정을 비워냈다.
정확히는 중지 상태지만,
지금은 오리지널인 일본 자격만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인스타그램에서 자격과 설명의 언어를 지운다.
누구의 철학을 대변하는 삶이 아니라,
그 철학을 통과해 나온
오직 나다운 삶의 감각을 기록하고 싶어서다.
가졌기 때문에 비울 수 있었고,
살아봤기 때문에 떠날 수 있었고,
믿었기 때문에 이제는 놓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설명을 덜어내고,
그저 내 설렘을 따라갈 뿐이다.
<소유냐 존재냐>에서 말하는 존재적 삶을 향해
해방감을 느낀다.
야 -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