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 허기진 밤 #069
해가 기울어 태양과 지평선이 닿을 듯한 시간. 난간에 앉아 두 다리를 흔들며 바닷가를 보면 고요하다. 모래에 부서지는 파도의 소리만 나의 귀에 들려올 뿐, 나를 건드리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차피 울리지 않는 핸드폰도 볼 필요가 없다. 반복되는 붉은 파도를 계속 보다 보면 모든 고민들이 어리석다. 그리고 찰나 같은 삶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옆에는 근처 카페에서 산 시원한 페퍼민트 티가 있다. 한 모금 마시면 시원한 민트향이 입안에 가득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달고 살았지만, 최근 속이 더부룩해서 커피를 잠시 끊었다. 이제 괜찮다고 생각할 즈음, 다시 아메리카노를 마시니 오랜만에 느껴보는 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낯설어진 듯 속이 쓰리기 시작했다.
죽음과 관련된 생각으로 펜을 움직여왔다. 이 태도는 내 삶에서의 찰나의 유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어쩌면 스쳐 지나가는 트렌디함이 아닌 클래식이었을까? 이런 태도와 입장이 나의 기반을 이루는 기둥일까.
죽음을 생각해 보면, 나는, 무언가를 감당할 수 없어 죽음과 친해진 것이 아니다. 하루하루가 지루하고 느끼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의 자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삶으로 죽는다고 말할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현실이 지루한 지옥이었다. 삶은 닿을 수 없고, 이룰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내가 가진 건 한없이 빈약했다. 잠시 생각해 봐도 앞으로의 삶이 너무나 선명했다. 그 선명함은 곧, 무의미였다.
쓴 커피를 마실 수 없는 것처럼, 나는 이제 내가 가진 것들을 하나씩 놓아야 할 때였다. 무릇 늘지 않는 재산뿐만이 아니었다. 나의 식습관 생활 패턴들을 수정하고 정제해나가야 했다. 그래야 그나마 고통 없이 살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점들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안에서 살고 있었다.
이런 불합리함을 이치라고 불렀다. 순리에 맞게 사는 것. 하지만 그 자체가 납득할 수 없었다. 왜 맛있는 것은 몸에 해롭고, 편한 자세는 건강을 해치게 만들어졌을까. 이해할 수 없지만 일단 이치라는 이름 아래 순응한다. 고통을 덜 받기 위해서. 왜 세상에 나를 맞춰야 할까. 고민해 보아도 어차피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나는 관성으로 살 것이다.
나는 의례 그런 것들이라는 순응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이는 안정감을 주는 것이 아닌 나를 구속하고 억압했다. 생각을 바꾸면 괜찮겠지만 사람의 생각은 너무나 단단하여 어려운 일일 터였다. 하지만 파도는 그저 칠 뿐이었다. 파도는 모래에 부서지며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점차 어두워지는 바다를 보면서 남은 삶도 이런 기분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제어할 수 없는 파도를 보는 것이 좋았다.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파도는 늘 잔잔히 칠 터였다. 느꼈던 불합리함이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상쾌함을 내게 주었다. 사람들은 폭풍과 같아서 나는 늘 휩쓸릴 뿐. 지탱할 수 있는 나의 다리는 너무 약했기에. 타협한 페퍼민트 티와, 제어할 수 없는 파도를 보며 맞는 바람은 시원했다.
바다의 무의미함은 내가 느낀 삶의 무의미함과는 달랐다. 바다의 예측가능함은 안정감을 주었다. 내 삶의 의미 없음과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기를 바랐다. 이는 나에게 어쩌면 재미를,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를 줄 수 있으니까. 우연한 만남, 성공, 실패, 나락 등. 변함없이 치는 파도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예측 불가능한 파도의 높낮이를 삶으로 느끼기를. 이런 흐름이 내가 살아가는 동안 늘 머물러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