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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적운 Sep 16. 2022

바깥세상에 적응하기 위하여

퇴원까지 몇 발자국?

2022년 3월 9일, 입원 44일 차


하루 종일 친구들이랑 통화를 했다.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모른다. 자주 안부도 묻고 인사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친구들이 언제 퇴원하냐고, 얼른 얼굴 보자고 재촉해 주는 게 좋아서 괜히 웃음이 났다.


전공의 선생님은 오늘 면담 때, 나에게 '통제 욕구가 강한 사람처럼 보인다'라고 했다. 강박증 수준으로 가지런히 정리된 내 병실 자리만 보아도 그게 느껴진다고 했다. 외부에서 누군가 그걸 건드리고 침습하면 미친 듯이 분노하고 화를 내게 되는 것이라 했다. 주변에 있는 많은 것들을 통제하려 하지 않냐고 물으셨고, 나는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 옷장 안에 옷을 넣어 두는 순서도, 물건들이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지도, 책장에 책을 꽂아 넣는 방법도 다 정해져 있다. 내가 가까운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일까?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수록, 그 사람들이 나의 생활 방식이나 영역 등을 침범할까 봐 두려워하곤 했다.

통제와 강박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내가 물었는데, 전공의는 통제와 강박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통제하고자 하는 강박'이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이라고 했다. 우선은 이를 인지한 것만으로도 나는 많은 걸음을 걸은 것이라고 전공의가 말해 주었다. 인지와 인정을 가장 어려워하는 내가 여기까지 오다니!


전공의는 내 통제에서 벗어난 것을 그냥 둬 보라고 했다.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지,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면서. 또 본능적으로 내 자리의 냉장고 내부를 정리하고, 책과 공책을 크기 순으로 정리하려던 손을 멈칫, 하고는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일단 지켜보기로 하면서.




2022년 3월 13일, 입원 48일 차


아침부터 종일 비가 내린다.

주치의는 이곳에서 관성을 만들어 나가면 일상을 영위하기 훨씬 수월할 거라고 했다. 그 말을 기억 속에 담아 두며, 계속해서 같은 시각에 같은 행동을 함으로써 관성을 만들어 가고 있다. 밖에 나가서도 같은 시각에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예를 들어, 8시 반에 꼭 아침 약을 챙겨 먹고, 오후 1시에 점심 약을 먹고, 오후 8시 반에 저녁 약을 먹는 것이다. 병원에서와 동일하게 말이다.


퇴원 전까지 내가 꼭 정리해야 하는 감정이나 생각의 종류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로 했다.

우선, 분노를 조절하는 것. 전에 복지사와 면담했던 대로 화를 가라앉힌 후 그때의 생각, 감정, 그리고 행동을 되돌아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이것을 꾸준히 훈련하다 보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오겠지.

그다음은, 자살 사고를 줄이는 것. 전공의와의 면담에서 전공의는 내가 죽음을 갈망하는 동시에 삶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천천히, 아직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느린 속도로라도 괜찮다면 조금씩 인정해 가려고 한다. 나는 정말로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면담 때면 꼭 어떻게 죽을지 얘기하면서도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마지막 순간 후회하며 살고 싶어지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다고 말씀드렸기 때문이다. 그래, 죽고 싶은 것도 나고, 살고 싶은 것도 나다.

마지막으로, 자해를 줄이는 것. 이건 도대체 어떻게 줄여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직은 개복치 같은 내 멘탈이 모래성처럼 쉽게 무너지고, 다 무너지고 나면 자해를 하게 된다. 일단 자해에 대한 충동이 올라오는 건 술을 마시면 더 심해지기 때문에, 밖에 나가서도 금주를 하기로 선생님들과 약속하긴 했다.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모든 환자와 의료진이 음성 판정을 받았고, 때문에 이제부터 코호트를 해제한다고 한다. 1인 1실에 이제 막 적응했는데, 조금 아쉽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2022년 3월 14일, 입원 49일 차


오전 중에 주치의 회진이 있었다. 약 조정은 어느 정도 끝이 났다고 말씀해 주셨다. 이제부터는 나의 속도를 기다릴 뿐이라고 하셨다. 나에게 퇴원하라, 퇴원하지 말아라 하지 않을 것이라며, 내가 준비가 되면 그때 퇴원을 생각해 보자고 말씀하셨다.

과연 내가 밖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확실히 난 지금 괜찮게 지내고 있다. 학교 강의도 놓치지 않고 들으려 하고, 과제도 열심히, 의욕을 담아 하려고 하고, 무엇보다도 열심히 무언가 쓰고 있다. 그러니까, 난 이제 도망치고 있지 않다. 내가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입원이었는데…… 도망친 곳에서 발견한 것이 도망치지 않는 힘이라니!

나에게 관성이 잘 생겼을까? 나는 종종 나가서 잘 지내는 내 모습을 상상하고, 혼자 웃음을 짓곤 한다. 혼자만의 집에서 어설픈 요리를 하는 내 모습. 그저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거기서 끝나 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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