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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슬 스커트 Jun 08. 2021

고목나무에 꽃이 피네.

아주 용한 점쟁이 아줌마를 만났다.

고목나무에 꽃이 핀다고 예언했다니 운명이 있는 건가.


'아주매는 고목나무에 꽃이 피겠네,라고 말하는 거라..'

이 문장은 내가 꽤나 어렸을 때 점집에 신년 운세를 보고 와서 엄마가 해주었던 얘기 중 하나다.

큰 언니가 결혼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으니 내가 대학교를 다니고 있던 때였던 것 같고 그게 벌써 20년이 훌쩍 넘은 이야기이다.


엄마는 언니 부부의 궁합도 볼 겸 가족들의 운세도 봤다고 했다. 

고목나무에 꽃이 핀다는 표현 자체가 너무 시적이고 멋있어서, 게다가 그 당시만 해도 별로 나아질 것 없이 보였던 엄마의 삶에 웬 꽃이 등장하니 그것도 새로워서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나는 요즘 그때 엄마가 정말 용한 점쟁이 아줌마를 만났다는 걸 알았다.

미래를 점칠 줄 아는 대단한 예언가였던 것 같다. 

실제 엄마의 인생은 나이가 들면서 좋아졌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고목나무에 피는 꽃'의 이미지는 어려서 우리 집 커튼에 그러 져 있던 매화와 같은 느낌이다.

매화라는 이름 자체가 주는 고전적인 느낌 때문인 것도 같다. 

아주 아름드리 굵은 나무에 피는 웅장한 꽃이 아니라 한 그루 외롭게 서있지만 수줍게 꽃을 피울 수 있는 매화나무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실제 매화나무의 특징과 엄마의 인생에서 피우는 꽃의 느낌이 참 비슷하다.


매화나무 열매가 매실이다. 
꽃을 매화라고 부르는데, 난초(蘭), 국화(菊), 대나무(竹)와 함께 사군자라고 하여 선비의 절개를 상징한다. 이른 의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점 때문이다. 특히 한겨울에 피는 매화는 설중매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벚꽃과 가장 큰 차이는 향기의 유무이다. 벚꽃에는 향기가 없으나 매화는 향기가 있다. 

[출처] 매화나무 - 나무 위키 


혹한을 지나고 여전히 기온이 낮지만 한낮 햇살의 기운이 따뜻함으로 돌아서는 초봄에 동네 뒷산을 산책하다가 음지에서 자라던 메마른 고목에 매화처럼 희고 조그만 단아한 꽃이 소리 없이 피어있는 걸 본 것처럼, 

엄마의 인생에 어느 순간 그렇게 꽃이 핀 것을 나는 보았다. 



노년의 행복이 찐이다.


아빠는 가끔 너무 돈 벌려고 애쓰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지금 돈을 많이 벌어도 그게 결국 다 니 것이 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고 하신다.


요즘 대세이신 주식투자가 존 리 선생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많이 벌고 투자하고 차곡차곡 모으면 나이 들수록 좋아지는 복리의 마법을 아빠는 모르는 것 같다.


아빠에게 돈과 부란 젊어서 그렇게 노력하고 움켜쥐려 할 때 뜻대로 되지 않았고, 내려놓고 순응하고 수용하며 감사하는 인생을 살다 보니 어느새 나이 들수록 더 풍요로워진 마음의 가치인 것 같다.

욕심 없이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가진 것에 감사하는 노년의 삶으로 부모님은 마음 부자가 되셨다.


노년의 삶과 관련하여 두 분은 나의 롤모델이다.

나도 두 분처럼만 늙을 수 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고 생각한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함께 할 수 있는 영혼의 파트너가 있으며, 자녀들에게는 너그러운 어른이고, 손주들이 오면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쥐어줄 수 있는 아주 작은 여유가 있는 삶.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속담이 있다. 참 맞는 말이다.

젊어서는 치열하게 고생하고 악다구니하면서 좀 더 나은 인생, 성공한 인생을 위해서 앞만 보고 달릴 수도 있다. 열정적인 시간 속에서 우리는 희열과 행복을 느낄 것이다. 왠지 내게는 이러한 젊은 시절이 행복은 참 휘발성이 있는 것 같다. 젊은 시절 만족감을 더 많이 느낀 사람도 있을 것이고 혹은 좌절감을 더 많이 느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삶은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노년의 행복이다. 

삶의 전반기에서 어떤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고 할지라도 삶의 후반기에서는 그 성적에 만족할 줄 알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부모님을 보면 젊어서 일구어 놓은 것들에 만족하고 나를 인정하면서 늙어가는 노년의 행복이 진짜 행복인 것 같다. 


세상의 조연으로서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한 부모님이 스스로의 복을 불렀다.


다 죽어버린 고목나무 같았던 엄마의 인생에 어떻게 꽃이 피었을까?

그 답은 엄마의 안에 있었다.

엄마는 나이가 들면서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스스로의 복을 불렀다.

사람들로부터 배척받는 나이 든 사람이 아니라 사랑받는 괜찮은 어른이 되셨다.

충고하려 하지 않고 공감하려 하면서 우리들과 눈높이를 맞춰주셨고, 조카들의 성장 과정에서도 항상 잠자코 뒤에서 응원을 해주셨다. 


한참 왕성하게 경제 활동을 하는 20-50대의 청년~장년층의 나이를 살아오는 동안 사람들은 사회의 주인공으로서 주목을 받는다. 체력도 좋고 머리도 잘 돌아가고 주변엔 사람도 넘쳐난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서 체력은 약하지고 머리는 굳어가고 두 번에 사람도 하나둘씩 떠나간다.

주연으로서의 사회적 역할에서 조연, 단역으로 역할의 비중도 줄어간다.

이러한 늙으면서 찾아오는 변화의 과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변화된 내 역할에서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사람이 될 때 비로소 괜찮은 어른이 되는 것이다.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나를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어야 하고 무엇이든 함부로 나의 기존 삶의 경험에 비추어 말하지 않는, 그런 사려 깊은 신중함이 몸에 베야만 가능한 일이다.


나의 엄마와 아빠가 모진 시간들의 흔적을 툭툭 아무렇지 않게 털어내고, 그들 안에 있던 응어리를 마음의 여유로움으로 치환하여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참 자랑스러운 일이다.


부모님은 스스로 고목나무 같았던 인생에 꽃을 피우셨다.


딸들을 시집보내고 엄마 인생의 고비가 서서히 끝나가면서 엄마는 많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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