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두 개와 배 한 개
시간은 참 잘 흘렸다. 어느새 명절이 코앞이었다.
퇴근 후에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고치고 점심시간에는 구인사이트를 보며 공고에 지원하기 시작했다. 대략 서른 개쯤 넣은 것 같은데 연락은 한 통도 오지 않았다. 조급해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은 생각과 달랐다. 연봉을 너무 높게 적은 걸까? 아니면 나의 경력에 메리트가 없는 걸까? 온갖 생각을 하면서도 일은 성실하게 했다. 머리보다 손 발이 한 템포 빠르게 움직여준 덕분이었다.
꾸준하게 일을 쳐내면서도 나는 틈이 나면 멍하니 허공을 보곤 했다. 점심시간이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밥만 먹은 후에 혼자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 벤치에 앉아 파랗게 맑은 겨울 하늘을 보며 크게 숨을 쉬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 동안에는 숨만 크게 쉬어도 그만두고 싶다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솔직히 숨 쉬는 것도 편치 않은 날들이었다.
최종적으로 모든 직원의 연봉이 동결되었다. 삼 년째 동결이었다.
뒤숭숭한 나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건물에는 명절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선물세트를 나르는 택배 기사님들의 구루마 소리와 바쁜 발소리가 쉼 없이 복도를 울렸다. 우리 회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택배 기사님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방문했다. 그리고 택배가 올 때마다 사무실 안 쪽에서 선물의 양이 줄었다며 한탄하는 사장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누구 들으라는 듯한 목소리가 여러 차례 울리던 어느 날, 고운 보자기에 싸인 한우세트가 도착했다. 택배 기사님이 테이블에 택배를 놓기가 무섭게 사장의 목소리가 사장실 문을 넘었다.
"김대리 나 오늘 늦게 퇴근하니까 고기 상하지 않게 냉장고에 넣어놔."
이어서 홍삼세트가 도착했다. 역시나 택배기사가 선물을 놓고 가기 무섭게 사장이 자리에서 고개를 쭉 내밀더니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새빨간 봉투에 크게 브랜드가 써진 홍삼 세트는 사장의 손에 들려 문 너머로 사라졌다. 그만큼 나이 든 이가 그토록 빨리 움직이는 걸 보니 홍삼은 안 먹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루하루 날짜가 지나, 연휴 전날이 되었다. 최선을 다해 업무를 모두 마치고 평소보다 30분쯤 이르게 직원들이 퇴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먼저 퇴근한 사장내외를 제외하고 남은 직원들끼리 테이블 위에 남겨진 선물 상자를 보았다. 일찍 퇴근하던 사장부부가 남은 선물은 직원들끼리 나눠 가지고 명절 잘 보내라며, 사람 좋은 목소리를 했었다.
테이블 위에는 배 한 박스와 오렌지 두 박스가 남아있었고 남은 직원은 다섯이었다. 그 박스들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그것을 참느라 어금니를 꽉 깨물어야 했다. 탕비실의 서랍에서 투명한 일회용 봉지를 꺼내오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배 다섯 개 오렌지 열개를 다섯 장의 봉투마다 나눠 담으면서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면 무슨 말이 나올지 예상할 수 없었기에 꾹 다물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고향으로 가는 KTX표 시간이 빠듯했으므로 나는 직원들에게 명절 잘 쇠시라는 한 마디만 겨우 남기고 걸음을 재촉했다.
명절연휴 전날, 퇴근시간의 지하철은 매우 한산했다. 그러고 보니 거래처와 고객사들도 전부 4시쯤 해서 업무를 마무리한다고 했었다. 여유로운 지하철을 어색해하면서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본가에 가져가야 할 큰 가방은 옆에 두고 무릎에는 회사에서 받은 과일봉투를 올렸다.
자리를 정리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KTX역으로 가는 지하철 안의 사람들은 전부 양손에 선물 세트들을 들고 있었다.
사람들 손에 들린 잘 포장된 다양한 선물세트들을 힐금거렸다. 참치세트, 샴푸 세트를 비롯해 고기, 기름 같은 정갈하고 예쁘게 포장된 선물 세트들을 지나쳐 무릎에 올려진 투명한 비닐봉지에 시선이 닿았다. 그 안에는 배 한 개와 오렌지 두 개가 들어있었다. 누가 그 조잡한 비닐봉지에 든 과일 몇 개를 설 선물이라고 생각할까.
언제나 작게 속삭이기만 하던 내 안의 목소리가 크게 악을 썼다.
"좆같네 씨발"
안에서 울리던 목소리가 입술 밖으로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소리에 깜짝 놀라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내 목소리는 아주 작았고 이어폰을 낀 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분명히 내 입술과 혀가 움직여 만들어 낸 나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동시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더 이상 마음의 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기 위한 임시조치였다.
시실 이직 준비를 차근히 진행하면서부터는 오히려 회사에 대단히 화가 나는 순간이 별로 없었다. 마음이 뜬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 이렇게 편안한 마음이라면 좀 더 천천히 제대로 이직 준비를 하면서 오래 다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고향에 가기 위해 챙겨 온 커다란 짐가방과 완전히 대비되는, 지하철 안의 그 누구와 비교해도 가장 초라한 비닐봉지를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지하철을 타고 KTX 역으로 가는 내내 나는 꾹꾹 눌렀음에도 불구하고 비명처럼 산발적으로 그 두 단어를 중얼거렸다.
"진짜 좆같네."
또다시 내 입에서 나온 음절이 귀를 타고 뇌로 흘러들었다. 부모님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잠깐 고민했다. 회사에서 선물로 받았다고 말하기는 쪽팔려서, 그냥 집에 있던 걸 가져왔다고 해야겠다 결정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책상 밑에 잔뜩 몸을 구긴 채로 마주쳤던 오백만 원짜리 부적이 떠올랐다. 연봉 백만 원을 올려달라고 했다가 회사 사정은 생각하지 않는 거냐고 혼이 났던 순간도 떠올랐다.
때 마침 지하철은 강 위를 건너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넘실대는 강물이 보였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2호선 안에서 나는 삶과 죽음을 가른다는 스틱스나 삼도천을 떠올렸다. 강을 건너는 그 순간 내 안에서 어떤 것이 완전히 죽어버렸음을 느꼈다. 강을 전부 건너 다시 땅이 보인 때,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연휴가 지나고 정확히 한 달 뒤, 나는 사장실에 서 있었다. 면담을 요청했으나 사실은 통보였다. 사유를 묻는 말에는 개인 사정이라는 짧은 단어만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며 마음을 돌려 보라는 사장의 말에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이미 확고한 마음이었지만, 그럼에도 생각을 해보라며 나의 사직서는 반려되었다. 그렇게 며칠의 시간을 더 보내고 나는 다시 사장실에 서 있었다. 생각을 해 보았냐는 사장의 말에 미리 작성해 둔 서류를 책상에 올리고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네모 반듯하게 접어 봉투에 넣었다, 봉투의 표면에는 '사직서'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정해진 이직처는 아직 없었고 대책도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더는 이렇게 일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이 것은 내가 자의로 한 첫 번째 퇴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