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호밀밭의 파수꾼>(민음사, 2001)
“불현 듯 외로움이 밀려왔다”, “정말 죽고 싶었다”, “우울해졌다”, “슬프고 외로워졌다”, “서글프게 느껴졌다”와 같은 문장이 가득하다. 어른이 되기 직전인 콜필드의 부정적인 감정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규격화된 삶으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규격화된 삶에 생명의 자리는 없다. 콜필드는 성장이라는 이름의 '죽음' 앞에서 격렬한 우울함으로 저항한다.
가출을 결심한 퇴학생이 며칠 동안 겪은 일을 다룬 이 소설은 놀랍도록 생생하고 설득력 있는 문체로 그 저항의 과정을 따라간다. 콜필드는 호밀밭에서 뛰어노는 어린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파수꾼을 꿈꾼다. 스스로도 바보 같음을 알고 있지만 꿈을 포기할 수 없고, 그래서 우울하다. ‘성장/어른=축복’이라는 공식에 불화를 느끼는 모든 사람들의 내면을 요동치게 만드는 소설이다.
콜필드는 종종 “변태 같은 일들”을 겪는다. 동성애적 친밀성 말이다. 결말부에 나오는 앤톨리니 선생님과의 직접적인 접촉뿐만이 아니다. 소설을 콜필드의 동성애 욕망이 부정당하는 이야기로 읽어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단서들이 작품 곳곳에 널려있다.
콜필드는 룸메이트인 스트라드레이터가 자신이 어린 시절 좋아했던 제인과 데이트하고 돌아오자 온갖 질문을 쏟아낸다. 표면적으로, 그 질문은 잘생긴 외모의 스트라드레이터가 제인과 어디까지 ‘진도’를 뺐는지를 추궁하고 질투하는 모습을 띤다. 하지만 콜필드가 정작 욕망하는 것은 제인이 아닌 스트라드레이터다. 스트라드레이터의 외모와 그가 속옷만 입은 채 콜필드에게 장난치는 장면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콜필드 욕망의 진짜 방향을 눈치채기는 어렵지 않다.
학교를 떠난 후에도 마찬가지다. 콜필드는 속옷만 걸친 남자들, 변태적인 남자들을 종종 마주친다. 그들은 콜필드와 직접 접촉하기도 하고 그를 스쳐가기도 한다. 공통점은 콜필드와 스트라드레이터 사이의 제인처럼, 둘 사이에 꼭 여성이 끼어 있다는 점이다. 콜필드의 욕망은 여성들을 경유할 때만 상대 남성들에게 도달한다. 그가 자신의 ‘진짜’ 욕망을 이미 ‘변태’로 규정해버렸기 때문에, 콜필드의 욕망은 여성을 매개·굴절하여 왜곡된 후에야 콜필드가 인지 가능한 형태로 변환되어 다른 남성에게 도달한다.
콜필드 욕망의 굴절·왜곡은 앤톨리니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앤톨리니 선생과 콜필드 사이에는 여성이 없다. 앤톨리니 선생님은 콜필드의 귀두(head)를 직접 만졌고, 매개되지 않은 날 것의 욕망에 콜필드는 극한 혐오를 느낀다. 콜필드는 “변태 같은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 바보처럼 땀을 뻘뻘” 흘려왔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일은 스무번 가량” 있었지만, 콜필드는 이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변태’를 향한 극렬한 분노와 혐오 이면에는 처벌의 공포가 있다. 콜필드의 무의식은 강렬한 퀴어혐오/자기혐오라는 방패를 만들어 퀴어를 허용하지 않는 잔혹한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 든다. 그 방패막 앞에서 드문드문 솟구치는 콜필드의 동성애적 무의식은 괴롭게 수축되어 간다.
‘어른’이 되는 것이 어린이의 죽음이듯이, 날 것의 욕망을 대면하는 것도 그에겐 죽음이다. 어른이 되는 것이 어린이의 미래를 없애버린다면, 진짜 욕망을 마주하는 것은 미래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콜필드는 욕망을 굴절시킴으로써만 죽음을 유예할 수 있다. 그는 미래를 허락받았지만 이는 욕망을 봉인함으로써 가능해지는 미래일 뿐이다.
요컨대 어른이 되길 거부하는 콜필드의 이야기는 거대한 금기 앞에서 우울을 강요당하는 퀴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콜필드가 죽음을 유예한 대가로 얻은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마주해야만 한다. 어린이면서도 어른일 수 있고, 여자를 매개하지 않고도 남자를 욕망할 콜필드를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