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하나지만 70년대 이촌동에 초등학교는 '신용산 초등학교' 단 하나였던 반면, 중학교는 의외로 많아서 '한강 중학교', '용산 여중', '신용산 중학교'등중학교가 이촌동에3개나 존재했던 시절도 있었다.
반면 고등학교는 아예 없었는데, 1990년 서빙고동에 있던 중경 고등학교가 이촌동으로 이사 오게 되면서 처음이촌동에고등학교가생기게되었다.
● 신용산 중학교
신용산 중학교는 1965년에 개교한 학교지만 한강로에 있는 용산 공고 안에 있다가 이촌동으로 이사 온 것은 1970년 이촌동에 신축교사가 생겼을 때였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학교는 이사온지 9년밖에 안된 1978년 신림동으로 또다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이때 학교 이름도 남서울 중학교로 변경되었다.
결국 신용산 중학교라는 학교가 이촌동에 존재했던 기간은 1970~1978년 간으로 꽤 짧았던 셈인데 과거 이 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1979년 '삼익 아파트'가 들어섰고 이 아파트는 2022년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사진) 사진 오른쪽 삼익 아파트가 있는 이 자리에 과거 신용산 중학교가 있었다.
사진) 삼익 아파트 놀이터 한 구석에남아 있는 신용산 중학교 유적비. 9년간 이곳에 존재했던 학교 흔적으로는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다만 이 삼익 아파트도 이미 재건축하기로 결정된 바, 재건축 이후에도 이 유적비가 남아있을지는 알 수 없을 것 같다.
● 한강 중학교
한강중학교는 신용산 중학교가 이촌동에 들어온 지 3년 후 1973년 이촌동에서 개교한 학교로 현재 중경 고등학교가 있는 자리에 있던 학교였다. 하지만 1990년에 서빙고에 있던 중경 고등학교와 학교 부지를 맞교환하게 되면서 이 중학교는 서빙고로 이전하게 되었고 반대로 서빙고에 있던 중경 고등학교가 한강 중학교 자리로 들어오게 되었다.
따라서 한강 중학교가 이촌동에 존재했던 기간은 약 18년 정도가 되는 셈인데 이 기간에 내 동생도 한강 중학교를 다녔고 또 졸업했다. 한편 당시 모두 이촌동에 살았지만, 누님, 나, 동생, 삼 남매를 통틀어 이촌동에 있는 중학교를 다녔던 경우는 내 동생의 이 한강 중학교 경우가 유일한 경우였다. 그 시절 누님과 나는 추첨에 의해 보광동, 신림동 등에 있는 학교로 배정받아 꽤 먼 동네에 있는 중학교를 다녀야만 했던 것이다.
사진) 현재 중경 고등학교 모습. 바로 이 자리에 과거 한강 중학교가 있었다.
● 용산 여중
용산 여중은 신용산 중학교가 이촌동에 들어오기 1년 전 1969년에 이촌동에서 개교한 여자 중학교였다. 남녀 통틀어 중학교로서는 이촌동에 가장 먼저 생긴 학교였던 셈이다.
그런데 1978년 신용산 중학교, 연이어1990년 한강 중학교까지 당시 이촌동에 존재했던 남자 중학교들이 모두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게 되자, 1990년 용산 여중은 남자 중학생들도 입학할 수 있는 남녀 공학으로 전환되었고 이때 이름도 '용강 중학교'로 변경되었다. 아마 용산 여중의 '용'자와 한강 중학교의 '강'자를 따서 '용강'이라고 학교 이름을 작명하게 된 것 같았다.
설립 이후 약 12년간은 여자 중학교로 운영되었다가이후남녀공학으로 바뀐 것인데, 신용산 초등학교 바로 뒤편에 좁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학교가 위치하고 있어서 당시 이 학교에 다니던 학생 중에는 신용산 초등학교를 졸업한 여자 동창들도 꽤 많았다.
이촌동에 있는 유일한 여자중학교였으니 당연히그 시절 이촌동에 거주하던 초등학교 동창들이 많이다녔던 것인데 흐린 날에는 머리카락이 모두 곤두서서 폭탄머리라고 놀렸던 곱슬머리 여자 동창도 이 학교 앞에서 자주 마주쳤던 기억이 있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뜨거운 여름날 그 폭탄머리 여중생을 이촌동 용산 여중 앞 거리에서 마주치곤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마냥 흘러 내가 이미 할배가 된 것처럼 그 여중생도 이제는 손주를 본 할머니가 됐다.
한편 용산 여중이 있던 자리 바로 옆에는 당시 미군 헬기장이 있었다. 신용산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운동장에서 남산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면 철책이 있었고 그 너머로 미군 헬기들이 분주하게이착륙하는 헬기장이 있었는데 바로 그 옆에 용산 여중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신용산 초등학교와 용산 여중 모두 헬기장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보니 그곳에서 들리는 헬기 소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는데, 헬기가 이착륙할 때는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 말씀이 전혀 안 들릴 정도여서 잠시 수업이 중단되는 일이 일상처럼 반복되기도 했었다.
중경 고등학교는 원래 서빙고에 있었는데, 오산 중학생에 다니던 시절 학교를 오가며 서빙고 길을 걸어 다닐 때 이 학교의 형님, 누님들을 자주 마주치기도 했었다. 그런데 당시 중경 고등학교는 두 가지 면에서 나름 꽤 특이한 학교였다.
첫째는 오직 군인 자녀들만이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남녀공학이라는 것이었다. 요즘이야 남녀공학이 너무도 흔하고 일반적이지만 70년대 당시는 중고등학교 대부분 남녀가 분리되어 있어서 중경 고등학교처럼 남녀공학인 경우는 이대 부고 등 몇 안 되는 매우 드문 경우였다. 한편 81년부터는 중경 고등학교도 입학 자격 기준이 바뀌어 군인 자녀가 아닌 일반 학생도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한다.
등하교 길에 오가며 마주치는 중경 고등학교 남학생 교복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는데 사관학교 생도복처럼 독특한교복이 매우 멋지게 보였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 이후 교복이 바뀌어 요즘 중경 고등학교 학생들이 입고 다니는 교복은 그 당시 교복과는 전혀 다르다.
검색하다 보니 70년대 그 시절에 중경 고등학교 학생들이 입던 교복과 학교 모습 사진들이 게재된 블로그도 있던데이 블로그를 통해 오랜만에 과거 그 중경 고등학교 교복 모습을 보니 아련한 70년대 서빙고 먼지 길을 걷던 그리운 그 시절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 같기도 하다.
중경 고등학교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전 중앙 정보부장이 군인 자녀 교육을 위해 설립한 학교였다. 잦은 근무지 이동으로 군인들이 자녀들 학교 문제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해결책으로 1970년 중경 고등학교를 설립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김재규도 학교를 설립한 지 10여 년만인 1980년에 사형을 당하게 되면서 이 땅에서의 생을 마감했다.
한편 당시는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전으로 한강변에 있던 오산 중학교는 서울의 거의 끝부분에 있었던 셈이었다. 따라서 이촌동에서 오산 중학교로 걸어가다 보면 서울시내버스의 종점도 있었는데, 이곳에서 큰 사고를 목격하기도 했다. 중경 고등학교 여학생 누나가 이 종점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후진하는 버스의 대형 타이어 밑에 한쪽 발이 깔리는 사고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비명 소리와 함께 그 누나는 쓰러졌고 주변사람들이 그녀를 업고 황급히 병원으로 이송하는 모습을 봤다.그 큰 대형 버스 타이어에 발이 깔렸으니너무아프기도 했겠지만매우 크게 다쳤을 것 같은데, 70년대 중학생 당시 서빙고 비포장 도로길을 걸어 다니던 시절을 회상하면 이 장면은 트라우마처럼 꼭 떠오르는 아픈 기억이다.
● 내가 다녔던 중고등학교
앞에 언급한 신용산 중학교와 한강 중학교 등 남자 중학교는 당시 이촌동 우리 집 바로 앞에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추첨 결과 이촌동에 있던 이 학교가 아니라 정말멀리 떨어져 있는보광동의 '오산 중학교'로 배정받았다.
그런데당시는 이촌동에서 보광동까지 전철은 말할 것도 없고 버스 노선조차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오산 중학교에 등하교하기 위해서는 이촌동에서 보광동까지 서빙고 비포장 도로 길을 먼지를 몽땅 뒤집어쓰고 매일 걸어 다녀야만 했었다.그나마그 오산 중학교가 '경기도 오산'에 있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지금도 그 비포장 도로길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당시 나와 마찬가지로 오산 중학교에 배정받은 이촌동친구 세 명과 함께 등하교했는데 그때 걸어가면서 책가방 들어주기 내기를 했던 것이었다. 요즘 중학생들은 결코 하지 않을 유치한 내기였지만 그 시절은 중학생들이 이런 내기도 하며 학창 시절을 보내던 그런 시절이었다....
한편 요즘이야 학생들이 등에 메는 가방을 갖고 다니지만 그 시절에는 모두 손으로 들어야 하는 가방이어서, 가위 바위 보에서 지게 되면 내 가방 하나도 무거운데 친구들 가방 무려 3개를 추가로 양손에 들고 서빙고 비포장 도로 길을 낑낑대며 걸어 다니곤 했었다.
그때 그렇게 같이 가방 들기 내기를 하며 중학교를 다녔던 친구들은 성장해서 모두 나름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다. 한 명은 유명 변호사가 되어 우리나라 최고 로펌 중 하나에 근무하고 있으며, 다른 친구는 건축 설계사, 또 다른 친구는 서울의 유명 대학 총장이 되었다.
반면, 그들에게 시련도 있었는데 이 세 명 중 두 명이나 40대 아직 한참 젊은 나이에 심장 수술이라는 큰 수술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이 인생에 기쁜 일만 있으면 좋으련만 결코 그렇지않고 고통과 시련도 함께 존재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인 것이다.
사진) 70년대 오산 중학교 학생이던 시절의 내 모습과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한편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 추첨운도 나는 역시너무 안 좋았는데, 이촌동 인근에 고등학교가 여러 곳 있었음에도 이번에는 훨씬 더 먼 곳, 즉한강 건너 대방동에 있는 성남 고등학교로 배정받았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대방동과 이촌동이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당시 같은 학군에 속해 있었는지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나마 이 성남 고등학교가 '경기도 성남'에 있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래도 이 고등학교까지는 그 당시에도 버스 노선이 있어서 매일 용산으로 걸어 나가서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는데, 그 시절 만원 버스라 불렸던 악명 높은 서울의 버스는 아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오죽하면 등굣길이유격 훈련을 받는 유격 코스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