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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속 동물 이야기 ②] 뭐든지 묵묵하게

by 데일리아트 Apr 05. 2025

뭐든지 묵묵히 소화해내는 영원한 동반자


봄이 절정에 이르는 4월이다. 항상 무엇이든 부지런히 준비해야 하는 봄에 가장 바쁜 동물 친구는 누구일까? 바로, '소(牛)'일 것이다. 예로부터 한민족과 가장 가까운 동물인 소는 궂은 농사일을 도맡아 하였고 힘든 보릿고개 시절에는 아이들이 진학할 수 있는 등록금 역할까지 했다.

          김홍도필 단원풍속도첩 중 논갈이의 소(조선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이처럼, 수많은 가축 가운데 소만큼이나 친숙한 동물도 없을 것이다. 예로부터 한민족과 가장 가까운 동물인 소는 농경을 기반으로 형성된 우리 사회에 있어서 절대적인 존재였다. 이에 옛말 중에는 ‘소는 하품 빼고 버릴 것이 없다.’ 혹은 ‘소는 농가의 조상이다.’라는 속담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누가 처음 생각해냈는지 모르겠지만 꽤나 그럴싸한 말이다.  


염라대왕과 업경의 소


불교에는 '극락(極樂)'과 '지옥(地獄)', 그리고 '육도윤회(六道輪廻)'라는 말이 있다. 살아생전 선업을 쌓고 자비를 베푼 이들은 극락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지만 죄지은 이들은 '시왕(十王)'에게 심판을 받고 열 곳의 지옥을 돌고 돌아 그 죄에 따라 각기 '축생(畜生)', '아귀(餓鬼)' 등으로 환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지옥을 묘사한 그림을 보게 되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오싹하여 죄를 짓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렇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사람이 살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청도 적천사 명부전 지장시왕상(조선 1676년)


그래서 사찰 한 편에는 항상 '명부전(冥府殿)' 혹은 '지장전(地藏殿)'이라는 전각이 자리 잡고 있다. 명부전은 죽은 영혼들을 구원해주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 곳으로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함께 '시왕도(十王圖)'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 시왕의 우두머리는 '염라대왕(閻羅大王)'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인도 경전인 『리그베다(Lig-Veda)』에 의하면 인간 가운데 최초로 죽음을 맞이한 이가 염라의 전생인 '야마(Yama)'였고, 그래서 시왕의 대표가 되었다고 한다. 이에 염라대왕은 맨 중간인 다섯 번째 지옥에 배치되어 죄를 심판하고 있다.



          고성 옥천사 시왕도 중 염라대왕(조선 1744년, 옥천사성보박물관)


여러 사찰에 봉안된 시왕도에는 염라대왕과 '업경대(業鏡臺)'가 함께 배치된다. 업경대는 심판을 받는 이의 죄를 비추는 거울로 생전에 지은 선악의 행적이 그대로 나타나며, 염라대왕은 그 죄목을 일일이 두루마리에 적어 무게를 잰다고 한다. 그런데 불교미술 속 업경대를 살펴보면 거울에 비춰져 있는 것이 바로 소이며, 한 남자가 소를 도살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것은 아마도 불교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살생(殺生)’에 대한 경각심을 보여주는 것 같다.



          옥천사 시왕도 염라대왕과 표현된 업경대


그렇다면 많고 많은 동물 중에 소를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바로 조선시대에 자리 잡은 소에 대한 관념으로 추정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은 농업을 근본으로 삼은 국가였고 이는 곧 농사일을 돕는 농우의 중시로 이어졌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살펴보면 이미 태조(太祖, 재위 1392-1398) 때부터 “사사로이 소와 말을 도살하는 것은 금해야 될 것이니, 이를 어기면 한성부로 하여 이를 관장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여 소의 도살을 금지하는 '우금령(牛禁令)'이 내려진 것이 확인된다.



          소의 건강을 기원하는 부적판(조선후기, 국립민속박물관)


우금령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도 찾아볼 수 있으며, 20년에 한 번꼴로 내려져 조선이 멸망하기 전까지 스무 번이 넘게 시행되었다. 더욱이 시왕도가 활발히 제작되던 조선후기에는 전염병인 '우역(牛疫)'까지 전국에 돌아 수많은 소가 죽어나가는 상황까지 오게 된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윤우정(尹遇丁, 1617-1664) 등 당대 유학자들까지 나서서 소의 도살을 금하자는 상소문을 조정에 올릴 정도였으니, 당시 소가 조선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했는지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경주 기림사 시왕도 중 염라대왕도의 업경(조선 1799년, 기림사성보관)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에서 소가 부족해지는 상황은 곧 국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고 사회 불안정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조선에서는 우금령을 계속 강화하게 된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조선후기 업경대에 빠짐없이 그려지는 소 도살 장면은 당시 상황을 반영함과 동시에 보는 이들로 하여금 살생의 경각심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소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로 인식되었는지 알 수 있다.



깨달음을 얻는 과정심우도



사찰벽화를 둘러보면 어린 동자가 소를 주시하거나 소를 탄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그림을 ‘심우도(尋牛圖)’라고 한다. 심우도는 중국 송(宋)나라에서 시작된 ‘선종화(禪宗畵)’로 우리나라 사찰벽화에도 즐겨 사용된다. 언뜻 보기에는 동자와 소를 그린 단순한 장면 같지만, 이 그림에는 매우 심오하면서도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것은 바로 선(禪), 불교에서 본성과 깨달음을 얻는 선의 수행 과정을 소를 찾는 동자에 비유한 것이다. 이와 같은 심우도는 ‘목우도(牧牛圖)’라는 이름으로 동자가 소 등위에 올라타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미술 주제로도 널리 애용되기도 하였다.



          전 노가필 목우도(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심우도는 총 열 단계 장면으로 구성되었기에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하며, 동자가 산속을 헤매며 소를 찾는 모습인 첫 단계, ‘심우(尋牛)’로 시작된다. 그리고 두 번째는 소의 발자국을 발견한 견적(見跡), 소를 찾아낸 ‘견우(見牛)’, 이어서 소를 잡는 ‘득우(得牛)’로 이어진다. 자, 이제 소를 잡는 것까지 성공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끝났을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진짜 중요한 부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동자는 잡은 소를 어르고 달래면서 길들이기 시작한다. 그러자 검은 소가 얼룩소가 되더니 점점 새하얀 소로 변한다. 이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다섯 번째 장면인 ‘목우(牧牛)’, 즉 소를 길들이는 것이다. 검은 소가 동자의 손길로 흰 소로 변하는 모습은 자신의 마음에 남아있는 온갖 악감정들이 없어지는 과정을 의미하며, 이와 같은 상태를 깨달음을 더욱 갈고 닦는다는 뜻의 ‘보림(保任)’이라고 한다.


          불교 경전에 표현된 심우도(중국 청대 1784년)


색이 완전히 변해버린 흰 소는 더 이상의 야단법석도, 도망도 치지 않는 순한 모습이다. 동자는 자연스럽게 소 등에 올라타고 피리를 불면서 집으로 향한다. 동자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아도 소는 알아서 발걸음을 옮긴다. 소와 동자는 한 몸이 된 것이다. 이것이 여섯 번째 단계인 ‘기우귀가(騎牛歸家)’이다. 그런데 동자의 피리를 보니 소리를 내는 구멍이 없다. 왜 소리도 나지 않는 피리를 부는 것일까? 사실 마음을 비우고 소와 한 몸이 된 동자에게 피리 소리는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닐 것이다. 굳이 소리가 나지 않더라도 동자의 마음속에는 그 은은한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구멍 없는 피리는 귀로는 들을 수 없는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밀양 표충사 사찰벽화로 표현된 심우도 중 기우귀가 장면(근대)


이후, 일곱 번째 ‘망우존인(忘牛存人)’부터는 소가 등장하지 않는다. 동자는 자신과 함께 온 소가 없어 당황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동자는 눈을 감고 깊은 참선에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결국 소는 자신의 마음을 비우기 위해 사용된 방편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입전수수(入廛垂手)’는 동자가 짐을 싸서 넓은 세상으로 떠나는 장면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는 아마 자신이 깨달은 선지식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하는 포교와 중생제도의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심우도의 소는 깨달음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과 올바른 수행의 길을 제시하는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외뿔박이 시우부처와 신선을 모시다



‘북극성’이 화현한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는 별자리로 길흉을 예측하는 점성술과 도교의 천문사상이 불교와 만나 탄생했다. 예로부터 모든 민족은 별을 신성시하는 별 숭배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가운데 북두칠성은 수많은 별의 황제인 동시에 우리 삶의 시작과 끝을 관장한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치성광여래 역시 수명을 관장한다고 믿어져 왔으며, 치성광여래가 등장하는 불화인 ‘치성광여래도(熾盛光如來圖)’에는 도교의 ‘자미대제(紫薇大帝)’를 비롯하여 일곱 개의 별을 상징하는 ‘칠원성군(七元星君)’, 인간의 수명을 주관하는 ‘수성노인(壽星老人)’ 등 수많은 장수 관련 신들이 등장한다.



          연화사 치성광여래도(조선 1878년, 미국 클리브랜드미술관)


치성광여래는 기본적으로 황금 바퀴인 ‘금륜(金輪)’을 쥐고 수레 위에 앉으신 모습이다. 여기서 이 수레를 끄는 동물이 바로 소이다. 인도와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진 이 모습은 소가 수레를 끌고 있기에 ‘우차대좌(牛車臺座)’, 흰 소가 수레를 끌고 있다고 하여 ‘백우거(白牛車)’라고도 한다. 그 명칭과 유래가 어찌되었든 간에 자동차가 없던 과거에는 소와 말이 주된 교통수단이었으니 수레를 끄는 소는 당시 동서를 막론하고 흔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소의 모습이 굉장히 특이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두 개의 뿔인 달린 소가 아닌 외뿔박이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삼재도회(三才圖會)』에 표현된 시우(중국 명대 1609년경)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백과사전인 『산해경(山海經)』에는 ‘시(兕)’라는 동물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외뿔소[兕牛]가 순임금 무덤의 동쪽, 상수(湘水) 남쪽에 있으며, 그 생김새는 소와 비슷한데 몸빛이 검푸르며 외뿔이다. 체중은 삼천 근쯤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아마 아프리카, 인도지역에 서식하는 ‘코뿔소(犀, Rhinoceros)’로 보이지만 현재 추측만 가능할 뿐이고 당시 사람들이 코뿔소를 자세히 본적도 없었기에 이를 『산해경』 내용대로 상상 속 서수인 외뿔박이 시우(兕牛)로 이해했을 것이다.



           김홍도필 파상군선도(조선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시우는 도교의 ‘신선도(神仙圖)’에서 그 모습을 먼저 찾아볼 수 있다. ‘곤륜산(崑崙山)’에 산다는 전설 속 여왕 ‘서왕모(西王母)’의 생일파티 장면을 그린 ‘요지연도(瑤池宴圖)’와 ‘파상군선도(波上群仙圖)’ 등 여러 신선 관련 미술에는 갖가지 생일선물과 권속들을 데리고 파티 장소로 향하는 신선들이 바다를 건너고 있다. 여기에는 『신선전(神仙傳)』에 기록된 여덟 신선인 ‘팔선(八仙)’부터 ‘사천왕(四天王)’, 보살에 이르기까지 당시 우리 문화에 자리 잡은 종교가 총 망라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김홍도필 파상군선도의 노자 부분


여기서, 어린 동자의 시봉을 받는 한 신선을 살펴보자. 휘날리는 하얀 수염에 인자한 미소를 짓는 이 신선이 타고 있는 동물이 바로 외뿔소 시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신선은 도대체 누구를 표현한 것일까? 몇몇 작품에는 신선의 이름을 명기한 것이 확인되는데 그 방제에는 이 노인을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기록했다. 태상노군이라, 어디서 한 번쯤은 들어본 이름이 아닌가? 그렇다. 태상노군은 도가가상을 정립한 ‘노자(老子)’를 말한다.



           전 김희겸필 산수인물도 중 기우출관(조선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그렇다면, 노자는 왜 소를 타고 있는 것일까? 중국 주(周)나라의 장서실(藏書室)을 관리했던 노자는 자신이 몸담았던 나라의 쇠퇴를 지켜보고 그 어떤 미련과 아쉬움도 남기지 않은 채 홀연히 떠나 신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당시 노자가 주나라를 떠났을 때 타고 간 동물이 바로 푸른 소이다. 『열선전(列仙傳)』에는 “노자가 주의 덕이 쇠퇴하자 푸른 소를 타고 서역으로 갔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기(史記)』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에는 “노자는 국운이 쇠미해진 것을 보고 소를 타고 나라를 떠났다.”라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노자의 마지막 행적, 소를 타고 국경을 나섰다는 바로 ‘기우출관(騎牛出關)’ 사건이다. 노자는 여유로운 소의 성격처럼 세상을 넓게 바라본다는 이른바, 느림의 미학을 실천한 것이다.


             푸른 소와 도가사상에 관한 내용이 기록된 윤언민 묘지명(고려 1154년, 국립중앙박물관)


기우출관의 개념은 우리나라에도 전해지게 된다. 고려시대 문인 ‘윤언민(尹彦旼, 1095-1154)’의 묘지명에 “관직에 임해서는 재산을 모으지 않고 푸른 소를 타고 관청에 나가 낮에는 일을 했다.”라는 기록을 보아 고려시대 때부터 이미 기우출관 개념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좌의정을 지낸 최고의 재상 ‘맹사성(孟思誠, 1360-1438)’도 출퇴근할 때 소를 탔다고 하며, 형조판서를 지낸 ‘이행(李行, 1352–1432)’은 자신의 호를 ‘기우자(騎牛子)’로 삼아 노자의 도가사상을 동경하면서 본받았다고 한다.


          정선필 청우출관도(조선 18세기, 성베데딕도회 왜관수도원)


이처럼, 옛 지식인들은 세상이 어지럽고 정의가 통용되지 않으면 물러나 지조를 지킨다는 ‘은일(隱逸)’과 여유의 기상을 소를 탄 노자를 통해 길렀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점들을 보았을 때 치성광여래의 수레를 끄는 소가 시우로 표현된 것은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상상 속 동물을 등장시켜 치성광여래 부처님의 경외심을 강조하려는 목적과 함께 도교를 거리낌 없이 수용한 불교의 개방성과 포용력, 그리고 도가사상에 담긴 여유로운 느림의 미학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마치며


우리 미술 속에 표현된 소는 주제에 따라 그 모습은 조금씩 다르지만 성실함을 보여주듯이 각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보는 이로 하여금 깨달음과 교훈을 주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우리들을 도와주었던 좋은 친구인데 소를 비하하는 속담이나 옛말들을 생각하면 다시 한 번 소에게 미안한 감정이 든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소에 관한 생각을 바꿔서 표현해 보면 어떨까? ‘미련하다.’보다는 ‘열심히 한다.’로, ‘아둔하다.’보다는 ‘묵묵하다.’라고 말이다. 거짓과 편법만이 판을 치는 요즘 같은 현대사회, 이제는 성실한 소처럼 우직하고 믿음직스러운 인물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미술 속 동물 이야기 ②] 뭐든지 묵묵하게...부지런한 일꾼, 소(牛)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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