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걸 참고 상혁이 눈을 뜨자 주인장과 고담이가 자신을 걱정스러운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익숙한 응접실 소파에 누워 차가운 얼음팩 같은 것이 머리에 얹어져 있고 팔 언저리에 젖은 수건들이 애처롭게 붙어 있었다.
“ 으.. 불.. 불이 났었는데.. 어떻게 됐어요. 괜찮은가요? 둘 다 다친 데는 없어요? ”
“.. 우린 괜찮아. 너야 말로 그곳에 들어오다니..”
“ 서재방에서 연기가 나서요.. 응접실 모두… 다 연기로 꽉 차서..”
정신없이 중얼거리던 상혁은 응접실 이야기를 하다 말고 주변을 둘러봤다. 이런.. 멀쩡하니 연기는 흔적조차 없었다. 분명히 연기로 가득 찬 걸 목격했는데.
“ 문이 열려있었나 보네.. 이젠 괜찮아.. 그나저나 그 방도 들어올 수 있었던 거야??”
“.. 급한 마음에 들어갔었죠.. 거긴 도대체 뭐예요? 거기 지하동굴 말이에요.”
“ 일단 쉬어. 너 오늘 밤은 쉬어야 해.”
“ 야옹~”
주인장과 고담이가 안전한 걸 본 상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잠결의 헛소리처럼 몇 마디를 더 중얼거리고는 다시 잠으로 빠져들었다.
…
“ 달그락”
상혁이 비몽사몽간에 눈을 가늘게 떴을 때 이어서 주인장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를 식사를 가져왔다.
어제 불기둥이 너무 뜨거워 분명 온몸에 화상을 입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상처는 없었다. 왠지 탄내가 남아있는 듯한 손가락 끝을 고담이가 안쓰럽다는 듯 냄새를 맡으며 핥아주고 있었다.
몸은 가뿐해져 있었고 두통도 가라앉은 뒤라 상혁은 사양하지 않고 빵을 수프에 찍어 싹싹 긁어먹었다. 배도 고팠지만 주인장의 요리 솜씨는 엉망이어서 이 정도 음식을 가져오느라 얼마나 고생했을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였다.
“ 고마워요.”
“ 음… 고맙긴.. 이젠 그저 운명이려니 해야지.”
“ 운명이요? 그리고 지하실 거기..”
상혁은 몹시 궁금한 게 많았다. 지하에 그렇게 넓은 동굴 같은 공간이 있어도 되는 건지, 그게 정상인 건지, 분화구처럼 활화산이 몇 개나 있던데 허가는 받고 건물을 지은 건지, 불기둥이 있는데 이 건물은 왜 멀쩡한지, 그 불길은 모두 다 어떻게 처리한 건지 묻고 싶었다. 자신은 누가 데리고 온 건지도…
“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랑 다녀와야겠다.”
“.. 네?”
다시 내려가자는 말에 잠시 멍해진 상혁은 두말 않고 주인장을 따라 일어섰다. 그녀는 부스럭거리며 맞은편 창고방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잔뜩 들고 나왔다.
“ 음.. 하나는 내 거고, 하나는 좀 더 사이즈가 큰 걸로…”
“ 이건..”
“ 오늘은 너도 입어야 해.”
상혁은 어제저녁 지하실에서 자신이 보았던 정체불명의 깡통맨이 입고 있던 그 반짝이 옷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주인장이 나눠준 것 중엔 헬멧도 있었다.
보는 순간 오즈의 마법사에서 나오는 양철맨이라고 생각했던 상혁은 그 옷의 정체가 특수 방염 소방복이라는 사실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애매하게 짧은 바지는 발목을 보호해야 할 것 같아 아래로 살짝 내렸고, 윗옷은 상혁의 몸보다 헐렁했다. 점퍼가 커서 중요 부위가 화기에 상하지는 않겠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이유가 헬멧까지 풀장 착한 게 보였다.
“ 이제 들어갈 건데 이번엔 나랑 함께 가니까 어제처럼 쫄지는 말고.”
“ 쫄기는 누가 쫄았다고 그래요…”
상혁은 나름 배포 있게 말했지만 왠지 말꼬리는 쪼그라들고 있었다.
“ 일단 들어가서는 큰소리로 말하면 안 돼.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설명은 짧게 할게. 질문은 다녀와서 하도록.”
상혁이 무어라 대꾸도 하기 전 주인장은 서재방을 노크하고 조심스레 살피듯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고담이는 마치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쏘옥 잘도 들어갔다.
‘고담이는 그냥 들어가도 괜찮은 건가?’
서재방의 벽면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어제 상혁이 봤던 건 말 그대로 시커먼 연기로 가득 차 있던 상태였으니 이 정도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커다란 공간이 텅 비어있어서 인지 두 사람이 내딛는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밖에서 보면 분명 서재방인데 책장과 작은 소파는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고요의 소강상태.
“ 오늘은 좀 더 주의해서 움직이자. ”
공간이 살아있기라도 한 동물인 것처럼 주인장은 조심스럽게 걸어가며 말했다. 드디어 어제 상혁이 내려갔던 그 철제 나선 계단에 닿았다. 한 계단 한 계단을 차근차근 내려가며 상혁은 어제의 동굴에 대한 단서를 찾으려 주변을 계속 둘러보았다. 하지만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한 건 두 사람이 지하의 바닥면에 도착했을 때였다. 발이 지하땅의 바닥에 닿자 짙은 어둠 속에서 시야가 천천히 확보되며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은은한 조명이 켜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이 상혁을 마치 누군가의 꿈속에 들어온 것처럼 어떤 것은 확실하고 어떤 것은 불확실하게 해 흐릿한 느낌의 경계선에서 서 있는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위쪽처럼 지하도 소강상태인 듯 어제의 마그마 같은 물질을 내뿜던 불기둥들은 사라지고 그저 비어있는 분화구 구멍에서 간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이곳은 어제 온 손님의 무의식 6층이야”
“ 네??”
주인장이 속삭이듯 말했을 때 상혁은 자신이 잘못들은 거라 생각했다. 뭐? 무의식? 분명 방호복이 너무 두꺼워서 오류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여기가 인간의 무의식… 잘 안 들린다고 생각한 상혁은 방호복 얼굴의 투명 덮개를 열고 주인장에게 물었다.
“ 그 손님의.. 뭐라고요?”
“ 쉿~. 그래 여긴 그 손님의 무의식의 첫 번째 층이라고 할 수 있지. 표층의식 바로 아래에 위치한 곳.”
그리고 은색 장갑을 낀 둔탁한 손으로 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 서재 방문을 열자마자 있는 위쪽의 층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억과 표층의 의식이 있는 곳이야. 기억과 함께 현재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층이라고 할 수 있어. 그리고 우리가 지금 있는 이곳은 그 바로 아래층,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믿고 있고 있는 무수한 설정들이 있는 곳이고. 그러니까 일종의 마음 세팅이 이미지화되어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지.
이곳이 분노의 화산으로 변한 건 어제 온 손님이 이제 정말 자신의 어릴 적부터 몸에, 무의식 속에 쌓여있던 정당한 분노를 인식했기 때문이야.
그때 인정받지 못한 분노라는 감정들이 이제야 겨우 분출되나 오고 있거든. 한꺼번에 나오느라 지금 굉장히 힘이 들지만 말이야.”
“ 에….”
상혁은 지금 주인장 이유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약간 벌린 채 멍하게 듣고 있었다. 무의식, 의식, 표층의식, 정체성, 기억?
“ 사장님..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제가 아무리 잠시 있다가 떠날 사람이라고.. 아.. 이거 허가 안 받았죠? 그래서 지금 저한테 양해라도 구해보실 요량인 거예요?”
이유는 약간 흥분한 채 어버버거리며 말하고 있는 상혁의 입을 손으로 가리며 조용히 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 그때 느꼈어야 했지만 지금이라도 느끼고 있으니.. 그 손님 어제 보니 힘들어도 스스로를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았어.
억눌린 열기가 올라오면서 스스로 파생시켜 만들어 놓은 자신에 대한 편견을 지금 부셔가고 있거든. 저 거대한 기둥들 중에서 아마 절반 이상은 사라질 거야”
“그게 무슨…. “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며 둘러보던 상혁은 아니나 다를까 어제 내려왔을 때와는 달리 신전을 받치듯 서있던 거대한 기둥들이 밀도가 상당히 엉성해져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진짜라고?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 질문할 게 많아지는 상황에서 상혁은 더 이상 큰 소리로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아 꾹 참았지만 넘치도록 올라오는 물음표를 감당하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동굴 내부의 다양한 공간을 돌아다니자 다양한 형태의 식물과 물건들이 여기저기 있는 것이 보였다. 진지한 와중에도 재미있는 건 그녀의 직업은 알지 못했지만 사무용품들이나 문구용품들이 여기저기 콕콕 박혀있다는 것이었다. 테이프, 노트북부터 유성펜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또 간간히는 도자기나 그릇들처럼 실제 사용하거나 나름의 미감을 갖고 있는 물건들도 있었다. 여기에도 누가 살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만큼 사람이 사용할 것 같은 물건들이었다. 상혁은 마치 자신이 무인도에 표류되어 동굴을 탐험하는 것 같은데 여기가 무의식의 세계라고 설명하는 주인장의 말이 도통 믿기지가 않았다. 보통의 물건처럼 보이는데 이런 것들이 누군가를 지칭한다고?
상혁이 이것저것 주변을 보는 사이 그녀는 기둥들을 하나하나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주변의 커다랗고 빨간 유성팬을 주워서 몇몇의 기둥 밑동을 따라 선을 그려 나갔다.
“ 분노가 올라올 때 보통 해줘야 하는 작업은 그 사람을 덮고 있는 원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편견들이 잘 타서 없어지도록 해주는 거야. 다른 엉뚱한 곳으로 그 분노가 가지 않도록 말이지. 분노는 엄청난 에너지라서 자신을 덮고 있던 이상하고 불필요한 것들을 태우기 가장 좋다고 할까.”
그러다 상혁은 문득 그 기둥, 아니 거대한 밑동 중 하나에 이르렀다. 원래의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거대했으리라 짐작됐다. 어른 4명이 팔을 벌려야 간신히 가늠이 될 만큼의 굵기를 가지고 있었던 기둥. 지금은 황토색물질들이 녹아내린 건지 주변으로 퍼진 건지 그루터기가 반쯤 남아있을 뿐이었는데 그 주변으로 무엇인지 모를 빨간 칠이 주변에 둥글게 칠해져 있었다. 아마도 주인장이 이전에 칠해 놓았던 것 같았다. 상혁이 옆으로 지나치려던 찰나 그 뿌리와 연결되어 있는 부분에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 나는 몸만 여자인 남자이다. 생각은 남자 그 자체..]
‘아? 이건 뭐 주문인 건가?’
상혁이 떠올려보니 그 손님이 상담때 했던 말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거.. 정말 그녀의 분노들이 그녀가 원치 않고 있는 정체성들의 기둥을 녹여버리고 있는 건가?
돌고 돌아 어떤 문에 도착했을 때 주인장은 방호복의 장갑을 벗고 그 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러고는 마치 허락을 구하듯이 입을 대고 무어라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다른 계단이 나타났다. 그 계단으로 내려간 둘은 이번에 아까와 전혀 다른 느낌의 공간과 대면했다.
마치 검은 우주와 같은 상태에서 어떤 상념 같은 텍스트들이 중력과는 무관한 듯 물결처럼 떠 있었다. 어떤 모양들은 푸른색의 빛나는 텍스트로 전환되었다가 다시 그 빛의 텍스트들이 뭉쳐서 어떤 이미지들을 만들더니 그 이미지 자체가 그 이미지에 맞는 행동들을 하거나 하면서 서로 놀듯 떠다니며 존재하고 있었다.
“ 여긴 그녀의 무의식 5층. 6층의 무의식보다 좀 더 심층에 위치해. 그 손님이 가지고 있는 자신이라고 생각되는 정체성을 만들게 되는 좀 더 깊은 표상들이 있는 곳이야 5층이 변하면 6층도 함께 변화가 찾아봐. 물론 더 깊고 더 근원적인 곳도 있지만 오늘은 가지 않을 거야. 진척상황이 좋은 편이니까 “
“ 우와. 아름다워요..”
“ 현재 주의가 집중되어 있는 상념이나 생각들 혹은 무의식적으로 세팅되어 있는 값들이 풀어지면서 앞으로 파도처럼 밀려 나오게 돼. 그런 다음엔 위층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런 세팅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표현되는 게 우리가 봤던 6층이고”
상혁은 도통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분노, 혹은 좋지 않은 편견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도 이렇게 실감 나는 가상현실 속 세계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게 그저 신기했다.
자신이 어디에 왔는지 잠시 잊은 듯 혹은 홀린 듯 그것들을 바라보던 상혁에게 그 푸른빛의 텍스트 중 하나가 넘실넘실 다가왔다.
곧 이어서 다른 텍스트들도 넘실넘실 흩어져 나왔다가 들어갔다를 반복했다. 그 파란빛의 무언가가 가까이 오면 각각의 내용들을 읽어볼 수 있었지만 뭉쳐서 들어가면 그것은 이미지 또는 빛 덩어리가 되어서 분별할 수가 없었다.
꽃은.. 보기도 싫어..
나는 남자 같은 사람인데.. 왜 여자의 몸을 한 거지.. 귀찮아..
색깔이 다양한 건 거슬려.
못생김..
안전을 위해..
사랑받고 싶어..
‘ 어.. 이건 무슨 상태를 말하는 거지..?’
이상한 울림 같은 것들이 있던 그때에 갑자기 쾅하는 울림이 느껴지자 상혁은 그것이 지나왔던 위층에서 불기둥의 분출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방금 풀어졌던 그 푸른빛의 텍스트들이 다가왔다가 변형된 것이 그 불기둥과 어떤 연관이라도 되어있는 걸까. 상혁은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 넘실거리는 실 같은 가닥들이 밀려와서 바람을 타듯 윗 층으로 떠 가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초심자에게 더 이상 오래 있는 게 어렵겠다고 판단했는지 주인장은 상혁을 잡아당겼다.
‘이크, 하마터면 또 통구이가 될 뻔했네’
마침 문 밖으로 나오고 나서 바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있던 불기둥 한 개가 용암을 내뿜으며 치솟아 올랐기 때문에 순간 상혁과 주인장은 최대한 벽으로 붙어서 빙글 돌아 나와야 했다. 아래층의 문은 어느샌가 자동으로 굳건히 닫혔고 이제 위층으로 나가는 길만 남았다.
뜨거운 불기둥 사이를 지나 어렵게 위층에 돌아오자 상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방금 봤던 게 진짜라고??’
상혁의 머리는 복잡한 와중에도 입었던 방호복은 벗어 창고방에 가지런히 가져다 두었다. 그리고 멍하지 소파에 앉아 있자 이유가 말했다.
“ 내가 말한 그대로야. 어제 그 손님의 무의식이지”
“ 이건 … 안되잖아요.. 말이”
“ 그러게.. 네가 손님들 이야기를 멀리서도 듣는 건 말이 되고? 처음부터 이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일단 설명은 해야겠지. 더 숨길수도 없고 나도 이제 조수가 필요하니까 말이야. 예전처럼 그런 일이 또 발생했을 때 또 손 쓸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건 끔찍하거든”
주인장 이유는 뭔가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 크게 숨을 쉬고는 상혁에게 말을 이어갔다.
“ 이 방이 나타난 건 우리 식구가.. 정확히는 할아버지가 이 건물을 사서 이사한 후 복덕방을 오픈한 직후였어. 그때도 손님이 오고 일상적으로 주고받던 이야기를 하고 간 날이었는데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다급하게 부르셨었지.
바로 저 방으로 말이야.
복덕방에 손님이 다녀가고는 지금처럼 저곳은 서재가 아니었어. 깜짝 놀란 아빠와 할아버지는 저 방에 대해서 물으려고 이전 건물 주인에게 연락을 했지만 왠지 그 사람은 종적을 완전히 감춘 상태였어. 건물자체를 마치 땡처리하듯 너무 저렴하게 내놓았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고 어른들은 말했지만 이미 거래와 이사가 마무리된 데다가 연락도 안 받던 노쇠한 이전 건물주가 얼마 후엔 사망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왔으니까. 결국 알고 있을 당사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이 기원에 대해선 더 알 수는 없었고.
한 동안은 계속 잠가두고만 지냈는데 어느 날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누군가를 돕는다면서 그곳을 통해 어딘가를 다녀오기 시작했어. 그때 난 아직 어릴 적이라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저 방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알지 못했지만. 그저 신기한 곳을 다녀왔다고.. 이야기해 주곤 하셨으니까. 그날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녀는 순간 아랫입술을 굳게 꽈악 깨물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상혁이 뭔가 물어보려 했지만 얼굴이 무거워 보여 더 이상 질문할 수 없었다.
“ 여하튼 그 이후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나도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면 가끔 들어가곤 했어. 뭐 도울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 말이야. 봐서 알겠지만 손님이 적극적으로 허락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야.
그 이후로 내 주요 관심사는 사람들의 무의식과 감정에 대한 것이고. 나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가치와 그것이 무의식과 어떻게 연결되어 작동하는지 연구하고.. 또.. ”
“ 잠깐만요.. 잠깐만..”
“ 응?...”
“ 정말 사장님이 아니 누님이 말 한대로라면 저기가 인간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특이한 장소이고 거기가 바로 우리 복덕방 서재 방문이라는 건데 저는 거기에 지금 취직이 되었다는 거예요?”
“ 어. 그렇지..”
“ 그리고 사장님은 인간의 감정과 무의식에 대한 연구 중이고요? 아까 그곳은 어제 손님의 무의식 영역이고..”
“ 응 ”
이유는 어깨를 씰룩 움직이고 살짝 미소까지 띠며 말하고 있었다. 상혁은 그녀의 놀리는 듯한 표정과 덤덤함에 그것이 몰래카메라 같은 짓궂은 장난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콘셉트는 좋지만 저도 나름 공부를 했다면 한 사람이라고요. 공간 이동기술은 아직.. 아까 그건 무슨 게임 속 가상체험 같은 거라고요. 공간이동이라니 무의식이라니.. 말도 안돼요.. 그건 단지 지하동굴이라고요. 서울시에서 이걸 파도록 허가했는지 모르겠지만.. 물론 제가 신고를 따로 할 생각도 없지만요.. 자 보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상혁은 자신을 놀리는 건지 몰래카메라를 하는 건지 모를 이런 황당한 말을 하는 주인장에게 이 세계는 지구의 대한민국 서울 복덕방 서재라는 걸 상기시키기 라도 하듯 서재 문을 열어서 뒤돌아 보여주려고 했다.
그런데 왠 걸 문이 열린 곳은 가지런하게 책들이 벽면에 꽂혀있었고 구석 벽면에 작은 창과 함께 응접실 소파와 같은 시리즈의 초록색 일인용 소파가 어서 와 책을 읽으라는 듯 거기 있었던 것이다. 당황한 상혁이 탄성을 질렀다.
“ 아~!!!”
“ 세 번 노크를 하고 들어가야 돼. 무의식과 연결된 곳으로 가려면. 서재에 가고 싶은 거라면 그냥 열고. 그렇지만 서재에 갈 때에도 노크는 두 번 정도는 해주길 바라. ”
너무 황당해하며 노크와 문 열기를 반복하고 있는 상혁을 보며 주인장은 이제 부엌으로 가 커다란 얼음잔에 시원한 밀크티를 가득 따라왔다.
…
‘ 이제 어쩐다…’
특별히 다른 날보다 한가한 월요일이었다. 다만 상혁의 머릿속 만은 한가하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서재 공간과 오래전에 복덕방을 차린 주인장의 할아버지, 게다가 원래 주인은 이 건물을 팔고 나서 곧 사망. 할아버지의 손녀인 주인장은 얼마 전 다시 이 일을 시작. 자신은 택배회사에서 잘리고 이곳에 취직함. 잠재의식과 연결되어 있다는데 보고도 믿기 어려운 상황. 마음은 복잡한데 머릿속은 내용 파악이 이미 되어가고 있었다.
어쨌든 오늘은 월요일이다. 보통 복덕방은 일요일에 쉬지만 카페들은 월요일에 쉬니까 어느 요일에 쉴지 고민하다 결정한 휴일. 고객들이 대부분 젊은 층인걸 감안해 일요일까지 복덕방과 카페 영업을 하고 월요일에 쉬기로 한 것이다. 여하튼 사람들의 월요일 출근 전쟁과는 거리가 멀게 된 상혁은 일주일 만에 찾아온 침대 속 느긋함이 너무 좋았다. 단지 이 일을 계속해야 할지 고민이 있을 뿐이었다.
오늘 아침은 패스할까 했다가 고담이랑 주인장도 밥을 먹어야 하니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어차피 주인장은 요리 실력이 없어 아마 자신이 없으면 또 맛없는 걸로 때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 무얼 먹고살아온 건지부터 계속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뭐 결론은.. 어찌 됐든 휴일이라는 것이었다. 장을 보아둔 재료가 똑 떨어져 특별한 메뉴 대신 카페에서 하는 프렌치토스트와 아메리카노를 응접실에 두고 고담이 밥도 챙긴 상혁은 오랜만의 자유시간을 만끽하러 나왔다. 일단은 이 이상한 곳과 잠시 거리를 두고 싶었다.
게다가 상혁에겐 약속도 있었다. 마침 고양이 둘레를 입양 보낼 때 도와준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던 것이다. 둘레를 입양해 간 자호까지 셋이 함께 얼굴이라도 보자는 연락. 만약 고시원 생활을 하면서 택배회사에 다녔다면 그런 이야기는 들었어도 시간이 없어 만나기 힘들었을 텐데 상혁은 이런 때 불러주는 곳이 있다는 게 고마웠다.
오래간만에 외출해 지하철을 타고 보는 서울 풍경은 왠지 낯설고 생경했다. 자신이 매번 치열하게 아르바이트하던 때에 바라보던 혹은 대면했던 그 도시가 아닌 것 같아 이상하다고 느낀 상혁이었다.
‘ 뭐지? 원래 이런 느낌이었나? ’
지하철 창문으로 보이는 한강과 도시풍경을 얼마 만에 본 건지 마치 자신이 서울에 관광이라도 온 것 같다고 느끼던 찰나 내릴 역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셋은 둘레를 데리고 있는 자호네 집 근처의 삼겹살 집에서 만났다. 대학 친구인 준석은 대학원을 들어갔다가 이제 막 박사를 갈지 취업을 할지 고민 중이었다. 자호는 그 준석이의 고등학교 친구였다. 자호는 누나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남매가 처음으로 고양이를 입양할 때는 새끼 고양이를 입양하려고 했다. 그러다 인연인지 둘레가 입양되어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친구. 그러니까 준석은 상혁이 이제껏 연락이 닿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 친구와 고양이를 입양해 준 자호까지 이렇게 셋이 만나는 자리는 둘레를 입양 보낼 때 이후 처음이었다. 그동안 취업이다 뭐다 고시원에 가기까지 전전긍긍하는 상황만 지내다 오랜만에 또래의 아는 친구를 만나는 건 상혁 자신을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것 같았다.
‘ 치이익~’
삼겹살을 올리기가 무섭게 불판 위에서 익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 셋은 안부부터 물어보느라 시끄러운 와중이었다. 준석이는 이제 논문은 패스하고 이래 저래 고민하다가 어제 연구실 사람이랑 대판 싸우고 나와서 오늘은 연구실에 들어가기 싫다고 푸념 중이었고, 자호는 둘레를 입양하고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누나랑 의기투합해 고양이 간식회사를 만들 준비 중이라며 의기양양해했다.
“ 그나저나 상혁이 넌 어떻게 지내?”
“.. 복덕방. 그러니까 부동산 일 배우고 있어”
준석이가 물었을 때 상혁은 잠시 뭐라고 대답하는 게 맞는지 몰라 주춤했다. 잠재의식의 세계니 서재방이 연결되어 있다느니 하는 이상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부동산 일을 한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니까.. 뭐 특이한 복. 덕. 방이긴 해도.
“ 이야.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 부동산 재벌 가는 건가요? 안 그래도 너 학자금 대출 갚느라고 힘들어했잖아. 아버님 그렇게 되시고.. 뭐 다들 학자금 대출은 당연한 편이긴 하지만”
“ 응.. 그렇지”
“ 그래도 너 뭔가 많이 밝아진 것 같다. 고양이 입양 보낼 곳 알아봐야 한다고 할 땐 나도 어떻게 위로도 못할 만큼 힘들어 보였는데”
“ 복덕방 일이 나름 신기하기도 하고..”
“ 복덕방? 와 할아버님이 하시는 곳인가? 나도 그 동네 근처 집 알아볼 일 있으면 상혁이 너한테 물어봐야겠다. 후후, 미리 말하지만 나는 좋은 곳 아니면 안 간다.
“ 나도 거기 사무실로 좋은데 있으면 좀 알아봐 줘. 회사생활은 안 맞아서 더는 못하겠어. 누나랑 이제 고양이 간식 사업도 해야 하는데 주방설비도 있고 좀 넓은데로. 어차피 우리야 지방에서 서울 올라온 거라 특별히 연고도 없어서 집값 싼 데나 사무실 괜찮은데 있으면 그리로 옮겨도 되거든”
“ 그래, 본격적으로 사업시작하게 되면 사무실이랑 상가주택도 필요할 것 같은데 매물 나오면 보고 있을 테니 연락 줘”
오랜만에 점심부터 배가 터지도록 삼겹살을 먹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아쉬워 치맥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각자 주변 상사들의 인성 걱정 코너를 한참이나 지났다. 남자 녀석들이지만 뭐 이런 수다쯤이야. 꽤 시간이 지나 한참 마시고 있을 때였다. 자호가 고양이 간식 사업계획에 대해 한참 들떠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갑작스레 준석이가 말했다.
“ 나 이제 대학원 그만둘 거야.”
“ … ”
준석이가 어떤 마음으로 대학원을 갔는지 잘 알고 있는 상혁이었다. 지방에서도 수재소리 들으며 올라온 준석이는 부모님의 기대에 맞는 대학을 그리고 회사를 가려고 무척이나 노력 중이었다. 그렇게 꾸역꾸역 올라간 대학원을 그만두다니..
“ 차라리 상혁이 네가 부럽다면 내가 미친놈인가? 네가 있을 때는 취업고민도 같이하고 떨어지면 서로 위로도 했었는데 난 이제 대학원에서도 계속 같은 고민만 하고 있으니까 다른 방법이 더 없어진 느낌이야.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싶어. 이상하고 비정상 같아. 이게 사는 걸까? 나 제대로 살아 있는 거냐?”
이만큼 온 것도 대단한 것이었다. 살아있는 것 맞냐고 오히려 집도 없이 떠돌이 신세인 자신을 부럽다고 이야기하는 준석에게 상혁은 화가 나기보다 오히려 마음이 쓰였다. 준석이도 자신이 아닌 남의 인생을 살고 있어 그런 거니까.
꾸역꾸역 마신 술에 분위기는 무거워졌지만 상혁은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 친구들과 있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친구들과 있으려니 상혁은 짊어지고 있던 짐을 잠시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치킨을 먹을 때만 자신을 떠돌 리던 때보다는 나아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무리하고 돌아갈 시간. 자호가 집에 잠시 들러 둘레를 데려왔다.
‘ 아.. 우리 둘레다. 나를 기억할까?’
둘레가 오자마나 상혁은 케이지를 열고 잘 지냈는지 안부를 묻는 손가락 동작을 했다. 신기하게도 둘레는 아직 기억하는지 상혁의 손을 거부하지 않고 잘 받아준다. 오랜만의 인사가 끝나자 자호가 마치 부연 설명하듯 말해주었다. 자신도 누나도 너무 예뻐해서 건강상태도 사랑도 듬뿍 받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아온다. 건강해 보이는 데다 털도 윤이 났다.
상혁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잘 지내라는 고마운 마음을 눈빛으로 건네곤 돌아가는 발길을 재촉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아침만 해도 그 이상한 곳을 멀리 떠나 있으려 나온 상혁이었지만 막상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하고 느끼는 오묘한 기분. 그런 기분으로 상혁은 지하철을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