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은 이미 모든 연령의 문제가 된 지 오래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는 항상 배를 만지며 뱃살 빼야 된다는 아우성을 지르고 있다. 얼마 전 친구는 뱃살 전쟁에 이길 수 있는 무기를 하나 사주며 잘 굴려서 식스팩 만들어보라고 했다.
항간에 뱃살이 찌는 이유로 '국물'을 마시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국물이 좋다. 특히 라면을 꼬든 꼬들하게 끓여 세 젓가락에 면질을 하고 숟가락으로 남은 면과 건더기를 조심스레 건져 올려 먹은 후 경건하게 냄비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아주 부드럽고 연약한 속 입술이 데지 않도록 순간적 도킹을 통해 뜨거운 라면 국물을 흡입하는 순간은 거의 사정의 순간처럼 짜릿하다. 뜨거운 온도를 살살 식혀가며 마시는 국물의 흡입 순간이 끝나고 냄비를 내려놓으며 나는 눈을 감고 입술을 혀로 훑어낸다. 마지막 국물의 순간은 그렇게 나의 행복을 위해 사라진다.
나는 폭주가 단점인 사람이다. 그 버릇이 왜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사실 술버릇마저도 안 좋아서 그 결과 인생에서 많은 기회를 술 때문에 놓쳐버린 일들도 많다. 항상 그랬듯 새벽까지 술을 마신 후 깨어난 어느 오후. 사체를 스스로 일으켜 세우듯 일어나 냄비를 찾는다. 물을 채운다. 머릿속에서는 라면 물을 상상하며 하지만 이내 밀가루가 싫다는 뇌적 반응에 나는 냉장고 문을 열고 김치통을 꺼낸다. 집게를 잡고 김치를 집는다. 두 번. 세 번 정도의 김치를 넣고 이제는 알약처럼 나온 육수 알약을 찾아 물속으로 풍덩. 그리고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던져 몸을 웅크린다. 속이 쓰리다. 머리가 어지럽고 세상 살기도 싫다. 계속 한 모금의 물보다 생각나는 국물. 세탁기 위의 레인지에서는 보글대며 국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연신 에너지를 쓰고 있다. 연기가 후드로 빨려 올라갈 때쯤 마늘 반스푼에 간장 약간과 소금 그리고 파와 나의 미각의 만족을 극대화시켜 줄 미원을 약간 아주 약간 넣고 조금 더 시간을 준다. 위대한 국물의 탄생을 위해
국물이 거의 만들어질 때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나의 쓰린 속을 위해 위~장을 훑어 내려가며 나를 위로할 국물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다. 그렇게 시작하는 만취 후의 위대한 국물 흡입.
한 모금에 다시 눈을 감는다. 두 모금에 눈물이 난다. 세 모금에
자아를 다시 찾아가는 과정은 거의 밀 속에서 다시 찾은 탐험가처럼 벅차오른다. 국물을 다 마시고는 부풀어 오른 배를 만지며 어떤 순간에도 느끼지 못했던 행복감에 사로잡힌다. 나의 김칫국은 그렇게 나의 어른 시절에 동반자였다.
오래전 나는 아내에게서 샤부샤부와 월남쌈을 배웠다. 샤부샤부 음식의 공간은 남성적이라기보다는 여성적이다. 자리를 잡으면 직원이 국물을 준비해 주고 기본적 세팅을 해준다. 그때 그 육수는 사실 그냥 재료를 넣고 미리 끓여둔 물인데 이런 육수에 갖가지 채소를 넣고 우선 끓인다. 숙주나물과 배춧잎, 팽이버섯과 어묵, 쑥과 미나리 등을 넣은 육수는 잠시 후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국물에 차돌박이를 넣고 쌀전병을 따뜻한 물에 살짝 적신 후 접시 위에 놓고 각종 야채와 차돌박이, 어묵을 얹고 전병을 접어 만두처럼 만든다.
땅콩 소스를 찍어 입에 넣는다. 몇 개를 그렇게 먹은 후 한참 동안 우려낸 국물을 국자로 떠서 그릇에 담는다. 월남쌈을 먹은 후에 국물로 입안을 씻어내는 순간의 행복은 어떤 음식보다 그 만족도를 높여준다.
아주 힘들었던 어느 날, 음주는 당연한 과정이다. 옛날엔 포장마차가 있어서 늦은 귀가마저 귀찮은 애주가들에게 새벽까지 달리도록 해주는 천국이었다. 그곳의 안주는 단연코 고갈비다. 그런데 늦은 밤 더 술을 당기게하는 것은 백합조개탕이다.
백합조개가 수북하게 원탁의 술상을 점령한다. 그 냄비를 둘러 놓인 각종 반찬들 중 인기가 좋은 것은 오이이거나 당근이다. 때론 고등어 무조림을 내어주시는 할머니도 있었고 때론 백합탕을 시켰는데도 기본으로 콩나물국을 차갑게 내어주는 모지리도 있었다. 술이 좋아 마신 술이 아닌 날 누구와 마시는지도 잘 구별이 안되면서도 또렷하게 내 귀로 들리는 소리는 보글보글 거리는 소리다. 백합탕을 기다려주기엔 그날의 스트레스가 너무 많았던 날이기에 이미 소주 한 병이 바닥을 드러냈고 '할머니, 소주'라는 의미로 말없이 소주병을 든다.
그리고 더 확연하게 들려오며 나의 코를 자극하는 백합탕의 향. 뚜껑을 열고 맛을 본다. 술로 취한 눈을 또렷하게 만드는 그 맛의 마술. 우리는 그렇게 또 한 잔을 마셨다.
내게 국물은 위로다. 나의 불확실한 미래에 힘을 준 국물. 세상이 온통 모순으로 느껴지는 순간마다 나를 달래며 그래도 살아내도록 속을 풀어 준 각종 국물이 나의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라면을 먹고 국물까지 감사하며 아주 맛있게 행복해진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젖는다. 저 진한 국물처럼 진한 맛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