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햇살이 따뜻하게 창문 너머로 비치는 시간, 진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커피잔을 손에 들었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활기찬 모습에 사무실 사람들은 마치 무슨 특별한 일이 생긴 것처럼 관심을 보이며 힐끔힐끔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 있었고, 어딘가 상쾌해 보였다.
그때 진아는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사무실은 점점 더 조용해졌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아... 저 유진아입니다.”
진아의 목소리는 상냥했지만, 어딘가 조금 설레는 기운이 묻어 있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민규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압니다.”
민규의 웃음이 섞인 대답에 진아는 한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본론을 꺼냈다.
“저기... 혹시 크리스마스이브날 저희 회사에서 파티를 하려고 하는데요, 어제 갔던 그 카페에서 가능할까요?”
진아는 최대한 침착한 어조를 유지하려 했지만, 속마음은 벌써 대답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민규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그 순간, 진아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니, 왜?’
그녀는 속으로 외쳤지만, 민규의 대답에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적은 길어졌고, 민규가 마침내 이유를 말했다.
“그날은 이미 예약이 되어 있어서요.”
진아는 실망을 숨기며 힘겹게 말했다.
“아쉽네요...”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진아의 실망스러운 표정을 본 사무실 사람들은 모두 탄식을 내뱉었다.
“에이, 안 됐네.”
“유 기자, 뭐가 잘 안 풀리는 거 같은데요?”
사람들의 반응에도 진아는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마음 한편에서는 그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려 했지만, 민규의 태도가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그로부터 몇 분 후, 진아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발신자는 민규였다.
진아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진아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의심이 섞여 있었다.
그러자 민규의 목소리가 장난스럽게 들려왔다.
“속았지요!”
진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요?”
민규는 웃으며 말했다.
“그날 예약 같은 거 없어요. 카페 비어있습니다. 가능해요.”
진아는 민규의 장난스러운 태도에 기쁘기보다는 황당함이 먼저 밀려왔다.
‘뭐야, 이 사람? 이렇게 사람을 놀려도 되는 거야?’
진아는 기분이 나빠졌지만, 최대한 감정을 숨기며 짧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진아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 사무실 사람들은 진아의 표정을 보고 상황을 짐작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유 기자, 뭔가 또 있었던 거 같은데요?”
“그 사람, 유 기자를 좀 많이 괴롭히나 보네.”
진아는 커피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가며 속으로 생각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하지만... 어쨌든 카페 예약은 됐으니 다행이지.’
그날 저녁, 다시 찾은 카페
저녁 퇴근길, 진아는 내내 고민했다.
'그 사람... 민규. 정말 괴짜야. 그런데, 그냥 넘어가긴 싫은걸?'
결국 그녀는 집으로 가지 않고 카페로 향했다. 어제의 그 독특한 분위기와 음악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페에 도착하니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안에서는 은은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고, 따뜻한 불빛이 거리까지 퍼지고 있었다. 진아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민규가 카운터에서 LP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진아를 보더니,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유 기자님,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오셨어요? 저한테 화 풀러 오신 건가요?”
진아는 민규의 농담에 약간 심기가 상했지만,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예약도 확실히 해야 하기도 하고 해서요.
민규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제가 커피 한 잔 대접할게요. 진짜로 예약은 문제없습니다. 걱정 마세요.”
진아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민규를 바라봤다. 카운터에서 커피를 내리는 그의 모습은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느낌이었다. 음악을 틀고, 커피를 만드는 손길이 자연스럽고 여유로웠다.
잠시 후, 민규가 커피 두 잔을 들고 진아 앞에 앉았다.
“자, 이제 뭐든 물어보세요. 오늘은 인터뷰 시간인가요?”
진아는 민규의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인터뷰까지는 아니고요. 그냥 예약 확인!
궁금한 게 많아서요. 어떻게 카페를 이렇게 운영하게 됐는지, 그리고 왜 음악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민규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이 카페는 제 오랜 꿈이었어요. 음악과 사람을 좋아해서, 그런 걸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죠. 대학 때부터 아르바이트해서 돈 모으고, 조금씩 준비했어요.”
진아는 그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요즘 같은 때에 LP판을 이렇게 모으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맞아요. 쉽지는 않았죠. 하지만 그게 제 방식이에요. 사람들한테 다가가려면, 뭔가 특별한 걸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제 취향과 열정을 담은 이 공간 자체가 제 이야기니까요.”
민규의 말에 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크리스마스이브 파티도, 여기서 하는 게 정말 괜찮은 거예요? 솔직히 부담스러운 건 아닐지 걱정돼서요.”
민규는 웃으며 말했다.
“전혀요. 오히려 그런 행사라면 환영이에요. 사람이 많아질수록 카페가 더 활기를 띠잖아요. 게다가 유 기자님 덕분에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은데요?”
둘은 그렇게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민규는 음악과 카페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했고, 진아는 그의 열정과 태도에 점점 매료되었다.
“근데,” 민규가 갑자기 말했다. “유 기자님은 왜 그렇게 회사 파티 장소에 신경을 쓰시는 거예요? 그냥 편한 데서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진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아뇨. 저희가 매년 하던 곳이 있었는데 국장님이 예약하는 걸 좀 신경 못썼나 봐요. 그래서 저한테 상의하시길래 제가 어제 여기가 생각이 났던 거예요.
“다들 일에 치여 살고, 무언가 즐길만한 추억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리고 어제 여기 와서 그런 생각이 들었죠. 이 공간이라면 그걸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민규는 잠시 진아를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최선을 다해 준비해 볼게요. 유 기자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진아는 그의 진심 어린 태도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고마워요. 민규 씨.”
그날 밤, 진아는 카페를 나서며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이 크리스마스 파티는 단순히 회사의 행사가 아니라, 자신에게도 특별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민규라는 사람... 어쩌면 그는 단순히 괴짜가 아니라, 진짜 특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