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N사의 D.P라는 드라마가 히트를 했다. 탈영병과 그들을 잡는 D.P라는 직무 소속 병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군대 드라마이다. 2014년도 헌병 내무 생활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2011년에 입대한 나는 어느 정도 공감이 되었던 드라마다. 후임을 괴롭히는 병장, 신경도 안 쓰고 누워있는 병장, 그들에게 아부하는 상병과 고통받는 일등병, 이등병까지. 내가 속해있던 부대에도 한 명씩은 꼭 있을 법한 캐릭터들이다. 하지만 DP에는 없는 캐릭터가 우리 부대엔 있었다. 바로 라면 중독자 말년병장이었다.
상병 시절 슈퍼스타 K도 나간 나는, 어느덧 병장이 되어있었다. 내 주 업무였던 인사 관련 일을 대신해 줄 부사수까지 들어오게 되면서 할 일이 없어졌다. 사실 할 일은 있었지만 하기 싫어서 도망 다닌 게 맞다. 지금 생각해보면 못난 사수였다. 매일 도망쳐 다니다 보니 시간은 많아졌는데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나의 부대는 강원도 양구에 위치해 있었고, 주위에는 논밭밖에 없었다. 양구는 알다시피 부대 주변 물가가 비싼 편이어서 딱히 부대 밖으로 외출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후임이었던 PX병(군대 편의점을 관리하는 병사)과 일과를 자주 보내곤 했는데 하루는 눈앞에 있는 많은 라면들이 보였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때의 난 갑자기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저 라면들을 다 먹어볼까?’
출처 : 네이버 블로그
그 당시에 PX에 있는 라면의 종류는 어림잡아도 40개는 넘었다. 하루에 하나씩 먹는다고 해도 휴가를 제외하고 남은 나의 군 복무일수보다 많은 개수였다. 웃기지 않나. 저걸 다 먹는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농심, 오뚜기, 팔도, 삼양에서 나를 채용해 주기라도 할까. 얻는 거라곤 튀긴 면과 짜디짠 국물에서 나오는 지방이라는 평생의 동반자 녀석만 웃으며 내 몸의 일부로 들어오려고 할 텐데.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이 목표가 추후 내가 농심이라는 라면 회사에 취직하게 될 복선이 될 줄이야.
‘시간이 얼마 없어. 하루에 한 개론 부족해.’
그렇게 하루에 3개씩 먹기 시작했다. 아무리 적어도 하루에 2개 이상은 먹기 시작했다. 나는 대식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한 끼에 라면 1개 이상 먹지 않았다. 그 말은 대부분의 식사를 라면으로 했다는 것이다. 라면을 매일 먹다 보니 스스로 나만의 기준이 생기기 시작했다.
‘A라면은 물을 정량으로 넣었더니 너무 싱거워.’
‘B라면은 C라면 보다 면이 굵어서 별로야.’
그렇게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나는 라면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라몰리에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눈을 감고 라면을 맛보면 어떤 브랜드의 라면인지 모두 맞출 수 있었다. 심지어 건더기 스프만 보고도 라면을 맞출 수 있을 정도였으니 한동안은 라면에 미쳐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비록 한 달 만에 몸무게가 7kg 이상 찌긴 했지만, 그때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저 라면들을 다 먹어봐야 했기에 쉴 수 없었다. 주위에서 말리기 시작했다.
“김 병장님, 그러다 진짜로 죽습니다.”
“전역하면 안 먹을 거야. 괜찮아.”
출처 : 글라이드
그렇게 말년 휴가 전까지 모든 종류의 라면을 한 번씩 다 먹어 보게 되었다. 사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목표를 너무 일찍 달성하고 나니 조금은 허무했다. 그래서 좋아했던 라면들을 리스트 업해서 다시 먹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곤 노트에 가장 맛있었던 라면 순위를 1위부터 10위까지 적어도 보고, 왜 맛있는지, 뭐가 부족한지 적어보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만큼 할 일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사회에 나가면 어차피 하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라면 중독.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에 삼시세끼 안성탕면만 드시던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그 당시의 나는 그 할아버지께서도 박수를 치실 만큼의 라면을 먹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라면은 간짬뽕이었는데 군인들만 아는 스팜이란 소세지와 간짬뽕을 함께 섞어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겨울날 초소 근무를 끝내고 먹는 라면은 미슐랭 가게 부럽지 않을 맛이라는 건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매일 하루에 4개의 간짬뽕을 먹곤 했다.
어쨌든 내 목표는 PX의 있는 라면들을 다 먹어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몰라주었지만, 목표를 이루었다는 성취감에 스스로 뿌듯했다. 그렇게 며칠 뒤 난 7kg의 동반자들과 함께 전역하게 되었고 어머니의 잔소리로 인해 당분간 라면을 멀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학교에 복학하고 나서도 바이오산업기계공학과임에도 식품공학과 수업을 듣곤 했고, 심지어는 전공이었던 기계 수업보다 훨씬 성적이 좋았다. 중요한 건 기계과 수업에선 안 잔적을 세는 것이 빠를 정도였지만 식품과 수업에서는 한 번도 졸았던 적이 없다. 전공 교수님들께 죄송할 따름이다. 이후 취업 시즌 당시 농심 면접에서 면접관분이 나의 이력서를 보고 웃으시며 물으신 적이 있다.
“그래서, 가장 좋아했던 라면이 뭐였어요?”
“삼양 간짬뽕이었습니다.”
내가 미쳤지. 농심 면접에서 삼양이 맛있다니. 면접관님 표정을 보고는 다른 회사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뒤 합격통보를 받았다. 아무래도 면접관님은 당찬 그 모습이 마음에 드셨나 보다. 그렇게 난 기계 공학이었던 우리 학과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식품 회사인 라면 회사에 취업한 학생이 되었다. 어떤 회사면 어떤가. 똑같은 대기업인데. 역시 고기는 꿩 대신 닭이지. 입사를 앞둔 난 이제 앞길이 창창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점심으로 라면이 나온다는 것과 수많은 술자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