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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늬 Moon Feb 13. 2024

나만 그런가?

사적인 나를 잘 마무리하기 위한 방법

나만 그런가? 남은 달력이 얄팍해질 즈음 재질이나 색깔, 속지 편집까지 살펴가며 다이어리를 고르는 게. 1월과 설 무렵 스티커나 색깔펜까지 동원하여 다이어리에 정성을 쏟아붓는 게. 나만 그런가? 그렇게 열심히 챙겨 쓰던 다이어리도 날이 따뜻해질 즈음이면 점점 손길을 덜 주는 게.


바람직하지 않음을 알고, 반성도 해보지만 좋지 않은 해거리 습관을 떨치기가 쉽지 않았다. 다이어리보다 휴대폰 어플이 더 가까웠다고 굳이 원인을 끄집어 내 본다. 또 하나는 직장에서 쓰는 탁상달력부터 업무수첩, 건별로 쓰는 일지나 서류 때문이다. 이미 거기에 중요한 계획과 일정, 내용이 들어 있어서 따로 쓰기에는 나의 에너지가 부족하다. 공적으로 충실해질수록 사적인 영역을 돌볼 여유가 줄어든다는 것 또한 아까웠다.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일과 관련하여 공식적인 자기 관리를 하게 된다. 끼니를 챙기듯 시기별로 부실한 부분을 채우려 애쓴다. 업무에 맞게 형식과 구색을 갖추어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직업에 스며들어 그 일에 알맞은 사람으로 살아간다. 적어도 일을 그만둘 때까지는.

반면 개인적인 영역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일은 어렵다. 병행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때도 많다. '아직까지 대한민국의 여성'이라서 그렇다고 써본다. 얼마 전 들었던 여성 직장인의 충격적인 이야기가 생각난다.

J상사는 생리휴가를 쓰는 여직원의 복무를 구두로 승인받는 걸로 모자라 옆의 다른 직원에게 "쟤, 지난달 생리휴가 날짜랑 안 맞는다. 거짓 복무 아니냐?" 했다 한다.

Y상사는 결혼을 앞둔 직원에게 "그러니까 피임은~"으로 시작하는 썰을 풀었다고 한다. 어떤 직종인지,  상사의 성별이 어떻고 나이가 얼마인지 따위는 중요하지도 않다. 이것이 10~20년 전의 일이 아니라 불과 몇 달 전의 이야기라는 것이 슬플 뿐.

이런 현실이다 보니 사적인 나를 업무현장에서 챙기는 일은 어렵기만 하다. 공적인 나는 영양실조가 될까 봐 자의든 타의든 돌보게 되지만, 사적인 나는 모르는 새 야위어 가고 있다.


그래서 사적인 나를 위해 아껴둔 마음을 먹었다. 일하는 동안 돌볼 여력도 없지만 결코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는 자신을 위해 '평생 다이어리'를 만들기로 했다. 매년 쓰다가 뒷전이 되는, 공적인 나와 비슷한 처지의 단기 다이어리는 안 되겠다. 평생 소중해야 하는 사적인 나를 위한 영원한 다이어리가 필요했다.

좋아하는 음악, 영화, 여행기록, 1년을 보내며 생기는 희로애락 뉴스 등 삶 전체를 돌아볼 수 있는 나에 대한 기록을 채워 넣었다.

나이 들면서 죽음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삶의 이치를 몸소 느낄 일이 많아진다. 그때마다 소중한 한 인생에 경의를 표하고 함께 눈물 흘려 보았던 이유로 내 삶을 잘 마무리하고 싶었다. 정돈되지 못하게 살던 나에 대해 적어도 내 죽음 앞에서 '인생 전체만큼은 잘 정리했다' 칭찬해 줄 수 있도록 가족들에게 꼭 남겨야 할 내용도 넣었다. 보험이며 은행계좌, 유언 쓸 칸만들었다. 생애 주기나 시기별로 바뀔 것을 대비해 몇 개의 칸을 여유롭게 만들어 두었다.

현재의 재정상태와 중장기 계획을 쓰다 보니 젊은 시기부터 이 다이어리를 쓰지 못한 게 아쉬웠다. 만약 그랬다면 가족들에게 유형, 무형의, 가치의 자산을 더 남길 수 있었으리. 앞으로 남은 년도를 칸으로 만드는데 마음이 무척이나 이상했다. 몇 년 후까지를 써넣을까? 내년 희로애락 뉴스에 좋은 일을 더 많이 채우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불과 몇 분을 투자하여 인생 전체에 채워나갈 다이어리 양식을 만들었을 뿐인데 내 인생이 더없이 소중했다. 훗날 나의 평생 다이어리를 보며 나를 추억할 이들을 더 사랑해야겠다.


#투자 #죽음 #다이어리 #달력 #평생 #영화 #음악 #여행 #관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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