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모르겠어, 뭐든 끝나는 건 싫어 인생도 드라마도.
사랑하는 순정아,
비바람 치던 겨울이 지나가고 햇볕이 따스해지는 2018년 10월 어느 봄날 아침이었어. 그즈음의 너를 위한 나의 기도는 네가 조금이라도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덜 받았으면 하는 것, 그리고 고통을 뛰어넘는 궁극의 평화를 얻는 것이었어. 그날, 오전 기도를 마치는데 마음속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렸어.
‘그녀는 이제 평화롭다.’
눈을 뜨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어. 내 얼굴에는 뜻밖에도 엷은 미소가 서려 있었어. 너에 대해 기도를 하는데 울지 않고 미소를 짓고 있다니 나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어. 그날 저녁, E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순정이, 오늘 오전에 하늘나라로 떠났어.’
그래, 그거였어. 그녀는 이제 평화롭다던 그 목소리가 사실이었어. 눈물이 쏟아졌지만 절망의 눈물은 아니었어. 곧이어 E의 문자가 다시 왔어.
‘일주일 전에 교수님 모시고 동기들하고 순정이 보러 갔었어. 순정이 그때는 아픈 애 같지 않았어. 우리 옛날 그 시절처럼 웃고 떠들고 그랬어. 순정이 평화롭게 떠났대.’
나는 감사의 기도를 올렸어. 네가 평화롭게 이 세상을 떠날 수 있게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기도드렸어. E는 사진을 한 장 보내주었어. 일주일 전 병문안 간 친구들과 네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어. 너는 살은 많이 빠졌지만 카메라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어. 네 눈빛도 29년 전 모습 그대로더라.
그리고 그날이 저물었어.
다시 해가 뜨고
그리고 해가 졌어.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순정아,
나는 12월에 한국에 갔어.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밥을 먹으면서, 길을 걸어가면서,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항상 네 생각을 했어. 한국에서 시간을 보내고 뉴질랜드로 떠나기 전에 네가 잠들어 있는 묘원에 가보아야 하는데 왠지 용기가 나지 않았어.
그러다 거의 한국을 떠나기 전날 가족 나들이 가는 날에야 용기를 냈단다.
유치원을 하는 넷째 언니가 대가족 나들이를 위해 12인승 노란 유치원 버스를 끌고 왔는데 나는 그날이 아니면 널 못 만나고 떠날 것 같아서 그래서 그날 우리의 가족 나들이 목적지가 네가 있는 공원 묘가 되었단다. 80세 넘은 할머니부터 5살 난 아이까지 대가족을 태운 우리의 유치원 버스는 경기도 어느 공원 묘에 도착했어.
묘원 관리인이 네 산소 위치를 알려주었는데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었어. 언니와 남편과 나는 그곳의 거의 모든 묘지를 뒤지고 다녔단다.
결국 관리소장이 나타나셔서 나를 트럭에 태우고 붉은 흙빛이 생생한 어느 산소 앞에 내려주었어. 그런데 산소 중앙에 있는 커다란 비석에는 000이라는 생소한 이름이 쓰여 있었어. 그 이름 옆에는 또 알 수 없는 이름들이 쓰여 있었고 어디에도 순정이 네 이름은 없었어. 그러다 발견했어. 묘를 네모나게 두른 비석 뒤쪽 귀퉁이에 작게 쓰여 있는 네 이름 석 자. 묘의 중앙에 크게 쓰여 있던 OOO라는 이름은 너의 시할아버지 이름이었어. 넌 그러니까 네 남편의 가족묘에 안장되었던 거였어. 구석에 박혀 있는 네 이름 석 자를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어.
‘결국 이렇게 되는 거야.’
그게 네 목소리였을까? 나는 그 목소리에게 말했어.
‘하지만 이건 너무 억울하잖아.’
‘누구에게? 너에게? 아니면 나에게?’
‘너에게. 순정이 너에게.'
‘나는 걱정하지 마. 나는 이제 아무것도 몰라. 억울함도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아무것도….’
순정아,
그곳은 어떠니?
성경에 쓰여 있는 대로 고통도 없고 약육강식도 없고 걱정과 근심도 없고, 지구에서는 느껴보지도 못한 평화와 충만함이 가득한 곳이니? 그곳에서 돌아가신 너의 엄마도 만났고 아빠도 만났니? 물론 하나님도 만났겠지? 그래서 그분께 물어봤니? 날 왜 이렇게 빨리 데려오셨어요 하고 물어봤어?
하나의 영혼이 지구에서 사라졌는데 세상은 변한 것이 없어. 나는 여전히 똑같은 나이고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거나 여전히 잘못 돌아가고 있어.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위해서 먹고 마시고 일하고 놀고 웃고 떠들고 자고 다시 아침이면 일어나서 먹고 마시고 일하고 놀고 웃고 떠들고.
가끔 차를 몰고 어딘가로 향하다 속에서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 때문에 눈물이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웃고 있어. 넌 달라졌는데 나는 그대로라는 게 당연한 건데도 참 이상해.
순정아, 솔직히 말하자면 달라진 게 있긴 있어.
나는 내 참모습을 발견했어. 법만 어기지 않으면 쇠고랑 찰 일은 저지르지 않았으니 나는 내가 꽤 괜찮은 인간인 줄 알고 살았단다. 그런데 나는 내 진짜 모습을 보고야 말았어. 시기하는 나, 사람들 앞에서 연극하는 나, 나한테 손해가 가지 않게 적당히 신앙을 갖고 싶은 나, 이간질하는 나, 거짓말하는 나, 악한 마음을 품는 나, 비열한 나, 가식적인 나, 돈을 엄청나게 많이 갖고 싶은 나, 어리석은 나, 무지한 나, 잘난 척하는 나, 함부로 남을 판단하는 나 등등. 나의 감추고 싶은 모습을 나는 몽땅 보게 되었어.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내가 나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 있어.
나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었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사랑을 주고받는 것에 인색한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단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얄팍한 사랑이었어. 조그마한 고통만 겪으면 그 탐욕스러운 이기심의 민낯을 드러내는 종잇장처럼 얇은 사랑.
예수님은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나는 그게 절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어. 아마 내 자식? 내 자식 정도나 돼야 내 목숨을 버리면서 그 아이를 지킬까 말까 일거야.
나는 내 진짜 모습에 실망했어. 성경을 읽으며 내가 혀를 끌끌 차던,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은 사람들이 다 나였더라.
순정아, 정말 미안해. 진심으로 사과할게. 기회가 있었을 때 네게 좋은 사람이, 더 좋은 친구가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가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순정이 너 얘길 입에 올릴 때가 있어. 내 얘길 들으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
‘어머, 친구를 쯧쯧. 전 가족을 떠나보냈거든요. 제 아버지는요…’
‘저런,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우리 엄마는요…’
그 사람들 얘길 듣고 있으면 내 안에서 누군가 소리쳐.
‘전 지금 순정이 얘길 하고 있거든요? 순정이! 아시겠어요? 내 영혼의 친구 순정이요.’
성경 공부 모임에서 은혜가 어쩌고 저쩌고 하나님이 어쩌고 저쩌고 잘도 떠들어대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어.
‘하나님, 순정이가 하늘나라로 간 게 당신 뜻이죠? 그것이 바로 징계와 은혜죠? 가만두면 그대로 지옥 갈 것 같아 회개하고 천국에 데려가시려고 다 계획하신 일이죠? 다 신의 뜻이니 순종하라구요? 근데요, 전 아직도 모르겠어요. 하나님, 전 진짜 모르겠어요.’
나는 하나님께 화가 나 있었어. 두문불출 집 밖을 잘 나가지 않았어. 대학에서 새로 시작한 공부를 아이 학교와 스케줄이 겹친다는 이유로 중단하고, 운동도 취미생활도 파트타임 일도 아무것도 안 했어. 그런 것들에 전혀 흥미를 가질 수 없었어. 남편은 새로운 직장으로, 호주로 떠나면서 내가 걱정됐는지 전에도 내게 했던 비슷한 말을 하더라.
‘세상에 소울메이트란 없어. 그냥 가볍게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만나는 만남도 나쁘지는 않아. 너처럼 꼭 그렇게 사람을 깊게 사귀어야 하는 건 아니야..’
세상에 소울메이트가 없다고 한 그의 말은 사실이었어. 넌 이 세상에 없잖아.
순정아,
네가 떠나고, 널 그리워하는 와중에도 내 이기심이 드러났단다. 나는 널 잃고 나서 내가 입은 손실, 소울메이트를 잃었다는 사실에만 집중했어. 인간관계에서 나 자신을 설명한다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그리고 나의 설명이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알기에 나는 내가 입은 손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거야.
예를 들면 이런 경우. 지인에게 내가 ‘00한테 싫은 소리 한마디 했어요’라고 말하면 그녀는 ‘저런 좀 참지 그랬어요. 참는 게 이기는 거지요’라고 말하지만 너라면 이렇게 말했겠지.
‘너 원래 남들한테 찍소리도 못하잖아? 그 사람 정말 엄청 이상한 사람인가 봐. 도대체 그 사람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해서 한마디 한 거야? 말해봐.’
너는 언제나 내 편이었는데…. 아니, 내 편이 아니라 나를 너무나 잘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내가 널 만났었다는 게 엄청난 행운이었고 신의 축복이었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아버렸어.
내가 널 보내고 나서 그나마 감사하게 느낀 것은 우리에게 죽음은 ‘육체와의 이별’뿐이라는 거야. 죽음이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켜 주는 유일한 방법이지만 육체는 썩어서 흙이 되고 영혼은 원래 돌아가야 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잖아.
사실 우린 육체를 가지고 있어서 좋은 점보다 괴로운 점을 더 많이 겪지 않았겠니.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배신감, 분노, 슬픔 등등의 잡다한 감정들로 인해 괴로웠잖아. 하지만 천국에서는 인간의 한계를 지닌 육체가 아닌 완전히 다른 몸으로 부활해서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다고 하더구나.
네가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놓이는데 그런데도 내 속에서는 끊임없는 질문과 의혹이 자라났어.
‘순정이 덕분에 넌 예수님을 만났고 거듭났다고 자부하고 있어. 그런데 지금 네 인생을 봐. 순정이가 그렇게 살고 싶어 하던 날들을 넌 뭘 하면서 보내고 있니? 예수님 만났다며? 순정이 덕분에 새로 태어났다며? 그런데 왜 네 인생은 여전히 시시하고 여전히 평범하고 여전히 비겁하니? 도대체 달라진 게 뭐야? 교회만 가면 다야? 기도만 하면 다야?’
그래, 순정아. 네가 떠난 후부터 내게는 새로운 고민이 시작된 거야.
‘나는 왜 살아야 하지? 내 인생의 의미는 뭐지?’
신앙마저 없었으면 우울에 빠져들었을 텐데 다행히도 나는 내 고민을 누구에게 가져가야 할지 알았어. 그래서 성경에 파고들었어. 약을 먹듯이 밥을 먹듯이 시험을 앞둔 수험생처럼 성경책을 읽었어.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넌 순정이가 겪은 그 고통을 겪고 있니?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너도 순정이처럼 죽고 싶은 거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물론 NO. 나는 네가 겪은 그 고통을 결코 겪고 싶지도 않고 당연히 죽고 싶지도 않았어.
‘넌 살아있잖아. 도대체 뭘 더 원하는 거야?’
맞아, 나는 살아있어. 그런데 나는 뭘 더 원하고 있는 거지? 혹시 나는 이런 얘길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던 걸까?
‘예수님 영접하고 나서 제 인생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전 아프리카로 선교를 떠나요. 보세요, 전 이렇게 바뀌었어요!’
아니면 이런 거?
‘보세요! 새로운 교회를 설립했어요. 제 삶이 이제는 충분히 의미 있어 보이죠? 저 꽤 괜찮은 인간이죠?’
부끄럽게도 나는 네 죽음에도 내 욕망을 들이붓고 있었단다. 뭔가 그럴듯하게, 사람들이 보면 깜짝 놀랄만한 대단한 일을 선보여서 내가 거듭났다는 것을, 네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거야.
나는 네 죽음을 놓고 드라마틱한 결말을 원했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흔히 영화에서 보는 성공스토리처럼 말이야. 무명의 작은 술집 가수가 스타가 되는 결말,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가난한 작가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그런 결말, 잿더미를 쓴 소녀가 신데렐라가 되는 그런 결말 말이야. 그런 결말은 세상의 기준에서는 아주 성공적인 결말이잖아.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내가 의미를 찾아야 할 곳은 떠난 너도, 남겨진 나도, 여전히 변함없는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가 아니더라. 내가 의미를 찾아야 할 곳은 바로 내가 딛고 있는 현실이더라. 진실로 내가 하나님을 만나서 다시 태어났다면 내 스토리의 결말은 세상의 그것과 달라야 하는 거더라.
그런데 순정아, 아직 모르겠어. 이 이야기의 결말이 무엇이니? 대답해 줘. 부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