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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K Moon Aug 19. 2024

제7화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라고 영혼을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라고 영혼을 그곳에 담았나 봐

사랑하는 순정아,


30년 전 신입생 환영회가 열리던 대학교 앞 식당에서 넌 내 옆에 앉아 있었어. 호기심과 생기로 반짝이는 그 커다란 눈망울로 넌 나를 보고 말했어.


“너도 딸만 여섯이야? 나도! 나는 다섯째. 너는?”

“나도 다섯째.”

“정말? 신기하다!”

우린 마치 잃어버린 자매를 만난 듯 반가워했지. 너가 세 번째 공깃밥을 시켰을 때 우리 맞은편에 앉아있던 선배가 진심으로 놀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야, 나는 태어나서 여자가 밥 세 공기 먹는 거 처음 봐!”

너는 조금은 민망한 듯 발그레한 얼굴로 말했어.

“저 원래 집에서는 이렇게 안 먹는데 이상하네요.”


그래, 이상하게도 우린 만나면 참 많이 먹었지. 어느 날인가는 이대 앞에서 만나서 근처 분식점을 돌며 밥을 3차로 먹으며 서로에게 말했지.

“우리 원래 많이 안 먹는데… 그치?”

“우린 실은 마음이 허기진 거야.”

“맞아. 외로우니까 먹는 건가 봐. 그런 의미에서 순대 하나 추가?”


20대 때부터 우린 오랜 세월 동안 외로움에 대해서 말해왔지. 처음엔 네가 여섯 자매 속에서 자랐으면서 외로움을 느낄 틈이 있었나 싶었지만 너가 어릴 때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듣고, 그리고 잠시 새엄마와도 함께 산 적이 있었다는 얘기까지 듣고는 네 외로움의 세계를 짐작할 수 있었단다.

우린 왜 그렇게 외로움을 탔던 걸까?

우린 그때 빛나는 청춘이었고 그래서 그 이유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아직 못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각자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생겼을 때에야 우린 큰 짐을 덜은 듯한 기분이었지.


하지만 우리가 더 외로워지기 시작한 건 결혼을 하면서부터였을 거야. 같이 숨 쉬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얘기하고 같이 웃고 같이 울고 내가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도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내 배우자가 함께 있는 삶인데 그래서 평생 외로움은 모르고 살 줄 알았는데 이건 반전이더라. 가족들에게는 날 설명하지 않아도 그들은 날 알았는데 배우자는 나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구조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지. 일일이 내 행동과 말과 생각을 타인에게 이해시키는 일의 피곤함을 처음 겪어야만 했어.

나는 또한 그가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지, 왜 그런 식으로 어지럽히는지, 왜 그런 식으로 삐지는지, 왜 그런 식으로 사는지 등등의 태클을 걸었고 그 역시 내게 같은 태클을 걸었지. 지금 생각하면 같이 사는 타인이 나와는 다른 습성을 가진 게 당연한 건데 그 다름 때문에 괴로워했다는 게 참 우스워. 아마도 나는 그가 날 사랑하니까 내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내 뇌 안의 모든 생각까지 날 완전히 이해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런 불가능한 기대를 했다는 게 내가 철이 없었다는 증거야. 그러던 중 결혼 3년 차에 떠난 이민은 나를 또 다른 차원의 외로움 속으로 안내했단다.


영어가 유창한 것도 아니고 이국땅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힘들 때 도움이 되어줄 친구 하나 가족 하나 없는 땅. 운전대도 반대, 계절도 반대, 변기 물 내려가는 방향조차 반대인 땅에서 나는 마치 주인집에서 세 들어 사는 세입자처럼 조심조심 살았단다.

웃을 때 껄껄 소리 내어 웃고 화날 때 욕하며 소리 지르고 고개 빳빳이 들고 다니는 백인들 틈에서 나는 예의 바른 동양인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웃을 때도 작게 웃고 화가 나도 참고 고개도 너무 쳐들고 다니지 않도록 주의했단다. 언어가 어느 정도 자유롭게 되고 새로운 문화에 대한 경험치가 쌓이고 나서는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내 존재가 ‘평범한 다수’에 속하지 않는 ‘눈에 띄는 소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고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외로워질 수 있는 생활이었어. 하지만 그런 종류의 외로움도 이민 온 같은 동포끼리 서로 위로하며 우정을 쌓으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는 외로움이었어. 내가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오직 나만이 겪고 있는 외로움은 그런 종류가 아니었어.


엄마들이 자못 열심히 어디서 뭐가 세일이라더라, 생선요리 양념은 이렇게 하면 맛있다더라, 어디 파트타임 알바는 시간당 얼마라더라, 남편은 이렇고 애들은 저렇고 등등. 그런 얘기들에 열을 올릴 때 내 생각은 혼자 안드로메다로 떠나기 일쑤였어.

나는 불쑥 ‘그건 그렇고 우리가 도대체 왜 태어난 걸까요? 이대로 살다 죽는 게 억울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요?’와 같은 그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 ‘이상하지 않아요? 어제도 태양이 동쪽에서 떴는데 오늘도 동쪽에서 떠요. 당연하게 보이지만 너무 신기하지 않아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어. 하지만 내가 그런 얘기를 꺼내면 분명히 전처럼 ‘00 엄마 정말 4차원이라니까’라는 반응이 나올 게 뻔했지. 물론 나도 일상의 이야기들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빵만으로는 살 수는 없는 거잖아.


순정이 너가 그리웠어. 너와 같은 하늘 아래 살았다면 우린 정말 많은 것을 공유할 수 있었을 텐데 싶었어. 영혼의 허기를 어떻게 메우고 살아야 할지 고민을 나누고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함께 웃음을 터트리고 그리고 아마 나는 너를 따라서 진작에 교회를 다녔을지도 몰라. 사실 내가 말한 이런 외로움은 그나마 생각과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을 찾으면 해소될 수 있는 것이었지만 내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었고 그게 날 더 외롭게 만들었던 것 같아.


굳이 비밀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는 힘든데 예를 들면 이런 거야. 남편과 산책을 하다가 내가 말해.

“A 길로 가자”.

우리가 A 길로 접어들자마자 내가 발걸음을 멈추고 말해.

“아니, B 길로 가자.”

남편은 의아한 듯 말하지.

“왜 그래? 그냥 가.”

“아니, 다른 길로 가.”

나는 남편의 팔을 끌고 B길 쪽으로 데려가. 남편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투덜대.

“아무튼 변덕은…”


순정이 넌 이미 짐작했을 거야. 내가 단순히 변덕을 부린 게 아니라는 걸.

가끔 나는 어떤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느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사악함이 내겐 느껴진단다. 얼마나 사악한지 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등골이 서늘해지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당장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 져.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아마 아이의 가톨릭 학교 입학 심사 때문에 내가 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그 이후부터였던 거 같기도 하고 아니면 더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도 될 것 같고 나도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아.

그래, 네가 짐작한 대로 나는 그 A 길에서 누군가를 봤고 직감적으로 다른 길로 가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어. 그가 내뿜는 사악한 기운에 질려서 그를 피하고 싶었던 거야.


이런 일도 있었어. 지인들끼리 다음날 운동 삼아 어떤 공원에 놀러 가기로 했어.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나는 그들에게 거짓말로 메시지를 보내.

‘몸이 아파서 오늘 못 가겠어’라고 말이야.

그 전날에 나는 꿈을 꿨어. 꿈 내용은 잊어버렸지만 공원에 가면 분명 안 좋은 일을 겪게 된다는 것을 꿈에서 깨자마자 나는 확신했어. 그래서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내야만 했지.

‘나 지난밤에 꿈을 꿨는데 말이야…’로 시작되는 정직한 메시지를 보내면 또 이상하다는 말이나 들을 테니 거짓말을 했어해 했어. 공원에 갔던 지인들은 아주 심각하지는 않지만 어떤 해프닝에 모두 연루되었고(지역신문에 난 정도) 애들 학교 픽업을 가야 하는데 차를 움직일 수 없어서 곤란을 겪었다고 들었어.


또 다른 일화도 있어. 아들이 네 살 때 아들이 다닐 유치원을 알아보러 다니고 있었어. 유치원 앞에 차를 세우고 내리려는데 갑자기 기분이 섬뜩한 거야.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고 나는 길 반대편에 세워진 차를 보았어. 그 차 안에 탄 여자가 날 보고 있었어. 나는 그녀와 나 사이에 놓인 그 거리를 뚫고 뿜어져 나오는 그녀의 사악한 에너지에 놀라서 나도 모르게 훅 숨을 들이마셨어. 나는 떨다가 간신히 용기를 내서 차에서 내려 유치원에 들어갔어. 아들을 보낼 만큼 괜찮은 곳인가 유치원 시설을 둘러보고 있는데 그녀가 들어왔어. 길 건너편 차 안에서 날 보던 그 여자. 그녀는 유치원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어. 나는 억지로 웃으며 잘 둘러봤다고 말하고 서둘러 그곳을 나왔어. 물론 그 유치원에 아들을 보내지 않았지.


나는 가끔 특이한 꿈을 꾸기도 해. 여러 꿈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는 이제 아주 익숙해진 꿈이야. 그건 집에 홍수가 나는 꿈인데 그걸 이틀 연속으로 꾼 날 아침에는 일어나서 집안의 수도꼭지들을 모두 살폈어. 아무 데도 이상한 곳이 없어서 정원으로 나갔어. 정원을 꼼꼼히 살피는데 나무가 심어진 옹벽이 젖어있는 것을 발견했어. 정원수가 심어져 있는 흙들을 둘러쳐 둔 나무 옹벽에 젖은 흔적이 있었어. 남편이 그곳을 파보니까 흙 속에 정원에 물을 주는 스프링클러가 심어져 있었던 게 드러났어. 거기서 물이 솟아 나오고 있었어. 그달 물세가 700달러가 나왔는데 고치고 나서는 다행히 물세가 정상적으로 나왔지.

얼마 전에도 홍수가 나눈 꿈을 꿨는데 다음 날 아침에 부엌 개수대 수도를 틀자마자 이음세에서 물이 솟구치더라.


한 번은 사악한 기운이 모니터 화면을 뚫고서도 느껴졌어. 유튜브에서 어떤 남자가 성경 해설하는 걸 보는데 그가 내 눈에는 좀 이상해 보이는 거야. 그가 카메라를 보면서 “여러분, 잘 보이시나요? 잘 보이시죠?” 하면서 동작을 멈추고 그 자세로 5초간이나 카메라를 응시하더라. 그때 그 남자에게서 악마를 보았어. 마치 호러영화에 나오는 마귀에 씐 사람의 모습이었어.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나 계속 들어봤는데 그 사람은 예수의 아들이 살아있고 예수의 자식들은 어쩌고 저쩌고 그런 소리를 하더라.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사악한 기운을 느낀다는 건 그 사람의 눈을 통해서야. 눈동자가 비정상적으로 크고 까맣게 보이면서 눈동자 주위가 검고 눈에서는 살기가 나와. 그 사람의 육체는 껍데기일 뿐 마귀가 그 사람의 육체를 가져다 쓰고 있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이 얘길 하다 보니 옛날 일이 또 생각난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우리 가족은 00동 단독주택에서 살았는데 우리 집 바로 뒷집에는 빨간 깃발이 꽂혀있었고 때때로 요란한 징 소리가 들려왔어. 나는 그 집이 무당집인지도 모르고 살았는데(그때는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는 수험생 신분이라) 그 집에 사는 망나니 같은 남자는 모르고 살 수 없었어. 그 남자는 뭐가 그렇게 괴로운지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특히 골목에 주차해 둔 우리 차에 그렇게 분풀이를 해댔어. 그 집에 살 때는 한밤중에 자다가 이상한 남자가 침입한 적도 있었어. 엄마가 기겁해서 비명을 지르고 남자는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서 도망갔지. 그리고 그 집에 살 때 부모님의 불화가 최고조였어.

아무튼 그 집에 대해 내가 기억하는 가장 이상한 일은 따로 있었어. 그때 우리는 옥탑방에 세를 놓았었는데 옥탑방이 비어있을 때는 나나 넷째 언니가 그 방에서 지내곤 했었어. 엄마가 큰댁에 가서 제사음식을 가지고 온 날, 넷째 언니는 음식을 접시에 담아서 옥탑방으로 가지고 올라갔어.

다음 날 아침 넷째 언니는 얼이 빠져서 아래층으로 내려왔는데 언니의 손에는 빈 접시가 들려 있었어. 언니가 식구들을 보고 물었어.


“혹시 여기 있던 음식 밤에 올라와서 누가 먹었어?”

우린 모두 고개를 저었어. 언니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어.

“내가 분명 나중에 먹으려고 두었는데… 아침에 보니 음식이 하나도 없어. 정말 나는 절대로 먹지 않았어.”

나는 실소를 터트렸어.

“쥐가 다 물어갔겠지. 뭐 그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라고.”


그러던 어느 날 밤 나 혼자 옥탑방에서 잠을 잘 때였어. 자고 있는데 귓가가 시끄러웠어. 나는 밤새 내 귓가에서 속닥이는 시끄러운 소리를 떨쳐버리려고 애를 썼지만 소용없었어. 그러던 중 어떤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어.

“집이 팔렸어. 이제 이사 갈 거야.”


바로 그날이었는지 다음 날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 목소리를 들은 후 우리 집은 팔렸어. 그 집을 떠난 후에는 다행히 부모님의 부부싸움은 말다툼 정도로 수위가 내려갔고 그 말다툼도 횟수가 줄어들었어. 그것이 아빠의 청력이 손상되었기 때문인지(아빠는 엄마가 자신을 욕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 아니면 기분 나쁜 영이 떠돌던 장소에서 떠났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겠지. 평화만 얻을 수 있다면 말이야. 아빠의 청력이 연세보다 일찍 손상되어서 마음이 아팠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덕에 아빠는 엄마의 잔소리로부터 해방되었으니 그런 걸 고난 중에 은혜라고 하는 건가 싶다.




순정아,

이런 얘길 내가 너 말고 누구한테 털어놓을 수 있었겠니. 나는 언제나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보다 인사이더로 살고 싶었는데 이런 나라니... 소수보다는 다수에 속하고 싶었고 평범하지만 적당한 권한과 적당한 인기와 적당한 돈을 가진 적당한 사회인으로 살고 싶었어. 하지만 내가 ‘이상한 기운’ 혹은 ‘마귀’ 어쩌고 하는 단어를 내뱉는 순간 내가 인사이더가 될 수 없다는 건 분명했어. 당시만 해도 진리 안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모르고 세상의 관습과 기준으로 사는 게 맞는 건 줄 알았을 때였어. 나는 내가 교육받은 대로 내 이성과 감정에 의지하여 세상을 살려고 했어. 넌 진작에 ‘절대 진리’를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얻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러지 못했어. 그래서 나는 내가 느끼는 특이한 느낌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치부하고 세상의 기준을 찾아 그것에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추며 살았어.


하지만 같이 사는 남편한테는 슬쩍 얘길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단다. 남편은 대번에 인상을 쓰고 ‘그런 이상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지. 남편은 자칭 무신론자에다가 과학을 신봉하는 이성주의자니 당연한 반응이었지. 그럴 때 나는 외로움을 느끼곤 했어. 하지만 곧 그런 생각을 떨쳐버렸지.

‘별거 아니야. 유난 떨지 말자. 믿거나 말거나 그런 프로 보면 특이한 사람들 좀 많이 나와? 나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 없어. 그냥 평범하게 살면 돼. 남들처럼.’


순정아, 그런데 그렇게 이성주의자인 남편도 옆에서 겪은 것이 있는지 어느 날엔가는 ‘장모님이 신기 비슷한 게 있으셔서’ 어쩌고 그런 말을 입밖에 내뱉더라. 네게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엄마도 참 특이한 분이거든.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내가 이곳에서 아이를 낳을 때였어. 그때 몸조리를 도와주러 한국에서 시어머님이 오셨었어. 나랑 남편은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가고 시어머님이 혼자 집을 지키고 계셨는데 엄마가 서울에서 전화를 했나 봐. 그때 엄마는 내가 애를 낳으러 병원에 갔다는 소식을 들으셨지. 나는 당일에 출산을 하지 못하고 진통을 하며 병원에서 밤을 지내고 그다음 날도 진통을 계속했어. 나중에 시어머니께 들었는데 오후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었대. 대뜸 지금 A.K가 애 낳는다고 빨리 대접에 물을 떠서 어느 방향에다 놓고 세 번 절하고 빌라고 그러시더래. 전화를 끊고 시어머님은 원래 그런 걸 하는 분이 아닌데도 ‘사돈이 하도 다급하게 말씀하니까’라면서 시키는 대로 하셨대. 나중에 내가 시어머니께 엄마가 몇 시쯤 전화했더냐고 여쭸더니 오후 3시쯤이었다고 하셨어. 내가 우리 아들을 오후 3시 5분에 낳았거든.


한 번은 이민 초창기에 우리가 돈을 노린 어떤 사람에게 속아서 가벼운 소송 비슷한 걸 해야 한 적이 있었어. 우린 이국땅에서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들과 같았고 덜덜 떨면서 걱정스러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단다. 그때도 엄마에게 전화가 왔었어.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 꿈에서 내가 남편과 서류 더미를 메고 낑낑거리며 너무 힘들어하고 있더라고. 나는 물론 아무 일도 없다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대답했지만 속으로 ‘역시 우리 엄마는 못 속여’ 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그런 엄마가 지금은 교회를 다니셔. 내가 예전에 엄마한테 물어본 적이 있어.

“엄마, 교회에서 성경 잘 배우고 있어요?”

엄마가 입을 삐죽 내미시면서 말했어.

“아이고 목사가 맨날 헌금 안 낸다고 호통만 쳐대는데 배우긴 뭘 배우냐? 그래서 교회 옮겼다. 여긴 돈 내라는 소리 덜해서 살 것 가텨.”


순정아,

그날도 나는 책상에 앉아 소설을 쓰고 있었지. 셋째 언니가 내게 소설보다 에세이를 쓰는 게 어떻겠냐고 너의 이민 생활기를 사람들이 더 궁금해할 거라고 했지만 나는 내 삶을 공개적으로 털어놓는다는 건 발가벗고 거리로 뛰쳐나가 노래를 부르는 것만큼이나 미친 짓으로 여겨졌어. 그리고 내 벌거벗은 몸은 너무도 보잘것없어서 구경거리조차 되지 않을 텐데 굳이 그런 창피와 수모를 자초할 필요는 없잖아. 그날도 나는 내 머릿속을 부유하는 온갖 이야기들을 컴퓨터에 앉아 토해내고 있었어. 그때 네게 카톡이 왔어.

‘A.K 야, 뭐 해?’


불현듯 마음속에 짜증이 일었어. 미안해, 순정아. 정말 미안한데 그때는 내가 그랬어. 너가 좋을 때는 연락을 안 하고 힘들 때만 연락을 하니까. 원래 친구란 게 그런 건데 힘들 때 같이 고민을 나누는 게 친구인 건데…. 우리가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멀리 떨어져서 통화나 문자만 주고받다 보니 너의 고민 패턴이 반복되는 것이 내 눈에 훤히 보이고 내가 충고를 해도 너가 내 충고를 듣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한편 절망스럽기도 하고 마음이 답답하고 그랬어.

아니, 그건 변명이고 솔직히 말할게.

실은 내가 2016년 12월 한국에 가서 너를 만나고 나서 2017년 초에 너가 네 사진을 보낸 적이 있었어. 너네 집 방에서 너가 셀카로 찍은 사진 말이야. 그때 휴대폰으로 그걸 봤다가 너무 놀라서 나는 휴대폰을 던져버렸단다. 놀라지 마. 솔직히 말할게. 나는 사진 속 네 모습이 무서웠어. 너랑 불과 몇 달 전에 한국에서 만났을 때는 전혀 몰랐어. 그때는 괜찮았는데 몇 달 후 사진 속 너는 내가 아는 순정이 네 모습이 아니었어. 물론 네 모습은 맞았지만 네 눈은 내가 아는 네 눈빛이 아니었어. 불쾌하고 불안했어. 나는 재빨리 나 자신에게 말했어. ‘왜 또 이래. 별것 아니야. 이상하게 굴지 말자. 잊어버리자.’

그 사진 사건 이후 한번 우리가 통화를 한 적이 있었어. 그때 너와 통화를 마치자마자 나는 아이와 무슨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어. 그러다 나는 왠지 모를 격한 감정에 사로잡혀서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어. 나는 놀라서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마음을 진정해야 했어. 정말 이상했어. 미안하지만 그 이후로 너와 화상통화든 뭐든 통화는 자제하고 그냥 문자만 나누게 되었어. 그게 너 카톡을 보고 마음이 불편해진  이유였어. 미안해. 그때는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친구였어. 정말 미안해.


‘A.K 야, 뭐 해?’

그날 책상 앞에서 네 문자를 보고 속으로 ‘뭐가 또 힘든가?’ 싶으면서 살짝 짜증이 올라왔어. 나는 답장을 보냈어.

‘응. 그냥 있어.’

‘건강하지? 여전히 글도 쓰고?’

‘그렇지 뭐.’

‘나 췌장암이래. 말기야. 이미 간에 다 전이돼서 의사가 수술 포기했어.’


순정아....

미안해. 난 정말 정신이 멍해지고.... 목이 막히면서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단다. 나는 네게 이렇게 답장을 보내려고 했어. 순정아, 그게 무슨 소리야? 작년에 우리 만났을 때도 멀쩡했는데… 오진이겠지 설마… 하지만 나는 한 글 자도 누를 수 없었어. 네게서 다시 문자가 왔어.

‘A.K 야, 나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래?’

내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흐르고 있었어.

‘뭐든 말해.’

‘교회 가서 날 위해 기도해 줄래?’

‘당장 교회 가서 널 위해 기도할게. 순정아, 내 말 잘 들어. 넌 꼭 나을 거야. 나는 믿어. 널 위해 기도할게. 아무 걱정 마. 사랑해, 순정아.’

‘고마워. A. K, 사랑해.’

나는 책상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렸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 오직 한 가지. 당장 교회로 가서 널 살려달라고 미친 듯이 기도해야겠다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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